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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찾은 2015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나처럼 작고 평범한 사람들이 들려준 역사의 민낯 전할 뿐” “소련-아프간 전쟁 때 100만 명 이상이 사살당했어요.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소년병사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살상에 대해선 침묵했죠. 국가와 미디어도요. 영웅들의 승리를 선전하고 ‘무기를 든 사람은 멋지다,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죠. 하지만 전쟁 속에선 그 누구도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2015 노벨문학상 수상자, 기자이자 논픽션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69)가 한국을 찾았다. 23일 개막하는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방한한 그는 1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전쟁과 평화에 관한 견해를 들려줬다. 평화를 위해서는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2차 대전·체르노빌 원전사고 생존자 등 인터뷰 기반 ‘목소리 소설’ 개척 전쟁의 참상 고발...억압·차별받은 여성의 서사에도 주목 지난 42년간 그는 소련 시대의 비극을 파헤쳤다. 제2차 세계대전, 소련-아프간 전쟁, 체르노빌 참사 등 현장을 취재하고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집해 책으로 펴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1985), 『아연 소년들』(1989), 『체르노빌의 목소리』(1997), 『세컨드핸드 타임』(2013) 등은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다. 저널리즘과 문학의 경계에서 ‘목소리 소설(Novel of Voices)’이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벨라루스 출신인 알렉시예비치는 기록자이기 이전에 스탈린 독재, 전쟁과 소련 붕괴를 목도한 생존자다. “나는 영웅들엔 관심이 없습니다. 나처럼 평범한,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공산주의의 민낯을 말하고 싶었죠.” 그가 “이념에 속고 착취당한 개인들”의 역사를 재구성한 이유다.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은 물론, 그들이 저지르거나 목격한 ‘악’까지도 생생히 기록했다. 소련 공산주의 담론과 전쟁 속 참상을 고발하는 그의 글은 소설처럼 강렬하게 독자를 끌어당기고, 때론 책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슬픔에 젖게 한다. 슬픔과 고통이 전부는 아니다. 알렉시예비치 작품의 힘은 연민과 공감에서 나온다. 그는 살아남은 이들이 상처 입은 타인을 연민과 애정으로 포용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살이 에는 겨울날 신발도 없이 끌려가는 독일군 포로에게 빵을 건네는 소련 여군, 포탄에 맞아 죽어가는 철갑상어를 보며 동물까지 고통받는 현실에 분노해 우는 여군, 전쟁 중 막간의 틈을 타 소녀 병사들이 치장하고 기분전환할 수 있게 돕는 남성 상사, 아들들이 전사한 후 모여 서로 돕고 위로하는 엄마들, 방사능에 노출돼 죽어가는 남편의 병실에 몰래 숨어들어 곁을 지킨 여성.... 스웨덴 한림원은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며 “우리가 잘 몰랐던 인간 존재의 역사와 감정의 역사, 영혼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유럽 평단의 찬사도 이어졌다. 2013년 독일출판협회상, 프랑스 에세이 부문 메디치상 등 권위 있는 문학상을 연달아 받았다. 쉬운 작업일 리 없다. 한 작품을 쓰는데 5~10년이 걸렸다. “작품당 200~500명가량을 인터뷰했습니다. 5년쯤 지나면 줄거리를 구상할 수 있게 되죠. 그에 맞춰 인터뷰 내용을 추려내 10년쯤 걸려 완성합니다. 기준은 그것이 ‘진실에 가까운가’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게 했을까? “비법은 없어요. 그들의 일상, 삶에 관해 묻고 대화를 나눌 뿐이죠. 내겐 그들의 지식뿐 아니라 그들이 지닌 ‘인간의 참모습’이 중요하니까요.” 모두가 ‘진실’을 듣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아연 소년들』 등이 출간되자 소련 공산주의 언론은 알렉시예비치를 맹비난했다. 소련 정부는 “여성 영웅들을 하찮은 존재로 묘사하고 대조국전쟁(2차대전의 러시아식 표현)의 영광에 먹칠을 했다”며 책 출판을 금지했다. “총도 쏠 줄 모르던 아들이 돈에 매수돼 참전했다 죽은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며 “진실을 알리고 싶다”던 한 여성은, 책을 본 후 “나는 내 아들이 살인자가 아닌 영웅으로 알려지길 원했다”며 알렉시예비치를 고소했다. 그는 “예술, 순수문학이 삶을 일순간에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말했다. 다만, 증오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봤다. “영웅주의, 군국주의 이념은 소련이 붕괴한 지금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많은 이들이 죽어 가는데도 러시아는 대화나 협상보다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죠. ‘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가 아닌가, 왜 우리 뜻대로 안 되는가’ 같은 강압적인 풍조를 느꼈어요. 하지만 증오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소련, 공산주의에 관해선 쓸 만큼 썼다”는 그의 다음 책은 ‘사랑’ 이야기다. “내 광기스러운 작가 인생이 어떻게 끝날까 생각해 봤더니 이제 인간의 행복에 대해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누군가 ‘이제 아픔이 없는 글을 쓰시겠다’라고 했는데요. 사랑이 아프지 않은 것인가요? 사랑에 관한 희극을 쓸 수도 있지만, 애통한 비극을 쓸 수도 있죠. 행복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는 “여성의 요직 진출이 활발해지면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일본, 중국을 둘러보면서 아직 남성들의 나라, 남성 사회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대통령, 국방장관, 국무총리 등 ‘검은 제복’을 차려입는 (사회적으로 높은) 직종은 대개 남성들 차지인 것 같아요. 이런 권력을 지닌 자리에 여성들이 더 많이 진출한다면 전쟁은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러시아나 한국에서 아직 이런 모습을 상상하기는 이른 것 같군요.” 스웨덴의 군사 퍼레이드에서 여성 국방장관과 임신한 군인을 봤던 일을 회상하며 “(여성이 요직에 오르는 일이 빈번한) 북유럽 국가들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알렉시예비치는 포럼 외에도 다양한 행사를 통해 한국 대중과 만날 예정이다. 오는 22일 오후 2시 서울대 러시아연구소에서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와의 대화’, 24일 오후 2시 서강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 초청 토론에 참가한다. 이번 서울국제문학포럼은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동 주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