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

전체메뉴 보기
  • SNS 기사 공유카카오톡으로 보내기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 2018 여성신문 30주년,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

  •  
  • SINCE 1988 : 여성운동 · 페미니즘 · 젠더민주주의

    성평등 사회로 가는 디딤돌,
    ‘여성신문’과 함께 해주세요.

[박 변호사의 이러시면 안됩니다]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만진 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만져 달라고 한 자.’ 둘 중에 누가 더 악질일까? 가히 이쯤 되면 세기의 대결 급이다.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이나 고충상담원 전문교육 강의 첫 머리에 이 질문을 늘 던진다. 정답은 뭘까? ‘글쎄요, 누가 더 악질인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둘 다 나쁜 사람 아닐까요?’ 라는 것이 필자가 생각한 정답이다. 도긴개긴이라는 얘기다. 뭐가 이리 싱겁냐고? 아동·청소년이나 장애인, 노인에 대한 성적 학대행위에 해당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성희롱은 우리 법에서 범죄로 다뤄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다보니 어떤 이들은 형사처벌 대상이 되는 성폭력범죄는 뭔가 중대하고 심각한 나쁜 행동이지만, 성희롱은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괴롭힘 정도에 불과한 것이라 이해하기도 한다. 우리 법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해 추행한 자를 강제추행죄로 처벌한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추행’이라 말할 때는 추한 행동 일체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법의 관점에서는 ‘추행’이라는 말이 추한 행동 전부를 의미하진 않는다. 일상적으로 쓰는 뜻으로 본다면야 성희롱도, 몰래카메라도, 심지어 강간도 모두 추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법적 용어로서 ‘추행’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의 의미는 아무래도 달라질 수밖에는 없다. 조금 거칠게 정리해 보자면 강제추행죄에서 말하는 추행이란 ‘만지는’ 등의 신체접촉을 행위자가 피해자에게 직접 하였던 경우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현행의 우리 법과 이에 대한 확고한 해석·적용례에 따르면 위의 두 사람 중에서 ‘만진 자’는 성폭력범죄로 형사처벌될 수 있다. 하지만 ‘만져 달라고 한 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피해자가 행위자를 만진 상황이지만 행위자가 피해자를 만진 것은 아니다. 이처럼 직접 신체접촉을 하였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에 더해 피해자를 감금했다거나 칼을 들어 협박했다는 등의 폭압적 상황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성폭력범죄로 처벌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사례가 있다. 어느 남성 사업주가 신규 채용된 여성 직원에게 술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게임 내용이 가관이다. 여성 직원에게 게임에서 진 벌칙으로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했는데 ‘점점 더 위로 더 위로’ 주물러 줄 것을 요구했단다. 그러던 중에 반바지를 입고 있던 사업주의 ‘중요 부위’까지 여성 직원에게 노출됐다고 한다. 그러면 이 사업주는 강제추행으로 처벌됐을까? 그랬어야 마땅할 것 같지만, 법원의 결론은 무죄다. 왜 그런고 하니, 만져 달라고는 했을지언정 사업주가 직접 만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법원은 이 사건에서 사업주가 여성 직원의 자기결정권을 현저하게 침해했다고 볼 만한 다른 사정도 인정되기 어렵다고 봤다. 말하자면, 이 사건의 사실 관계에서는 주무르는 행위를 회피하기 어려울 만치 폭행·협박으로 강제했다고 보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어떤가? 적어도 현재의 법적 관점으로는 ‘만진 자’와 ‘만져 달라고 한 자’ 중 하나는 성폭력범죄 가해자로, 다른 하나는 성폭력범죄 아닌 성희롱 가해자로 볼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이나 상식에 비춰 보건대 성폭력범죄로 처벌될 수 있는 ‘만진 자’보다 ‘만져 달라고 한 자’가 덜 나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성희롱은 그 개념에 포괄되는 현상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개중에는 경미한 괴롭힘 정도에 해당하는 성희롱도 물론 많다. 반대로 모든 성희롱이 경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만져 달라고 한 자’를 우리가 비록 성폭력범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것이 성폭력범죄가 아닌 성희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폭력범죄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만져 달라고 한 자’를 아주 심각한 수준의 성희롱 가해자로 봐야 한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맨 첫머리에 던졌던 질문의 의미가 확연해졌으리라. 성희롱이 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성폭력범죄보다 가벼운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일률적으로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언어적 성희롱의 경우에도 말로써 피해자를 괴롭혔을 뿐 실제로 만지는 등의 접촉행위를 하지 않았다 한들, 그것이 신체접촉 피해가 발생한 상황보다 덜 심각하다고 할 수도 없다. 신체접촉 피해가 발생한 때만큼이나, 혹은 그보다도 더 큰 상처를 피해자에게 남길 수도 있다. 범죄냐 아니냐의 문제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성희롱이든 성폭력범죄든 사람의 존엄성을 심대하게 침해하는 죄악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성희롱이라 해서 성폭력범죄보다 미약한 수준의 괴롭힘에 불과하다는 오해를 이제는 불식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 외부기고문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