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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캐릭터 ‘연희’는 서사의 장애물, 멜로 감수성의 객체, ‘운동권 오빠’에 환호하는 존재로, 배워야 하는 자리로 떠미는 남성적 민주화의 결과 ‘1987’은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낮은 영화가 아니다. 여성 비중을 이상한 방식으로 늘리면서 오히려 여성을 지우는 영화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특정 캐릭터가 예외적 상황에 떠밀렸을 때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화하는지 지켜보는 작업이다. 이런 점에서 ‘1987’의 주인공은 주요 인물 중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여대생 연희인지도 모른다. 남성 인물들의 상황, 선택, 변화가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 구도 안에서 완성된 형태로 응고되어 있는 반면, 연희의 그것에는 대결구도 외부에서 내부로의, 추상적 회의에서 실천적 저항으로의, 방관자에서 참여자로의 질적 변화가 포개지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 변화는 의심스럽다. 이야기의 끝에서 변화의 최종적 결과로서 메시지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변화를 쌓아가는 영화적 절차가 영화 외부의 작위적 관념, 즉 여성에 대한 삐뚤어진 인식에 붙들려 있다는 인상 때문이다. 연희의 대중적 호소력은 그녀가 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당시 일반인을 표상하도록 설계된 것에서 나온다. 질문이 생긴다. 표상의 주인을 하필이면 여대생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비정치적 군중과 포개지면서 연희의 서사적 지위는 굴절된다. 그녀는 삼촌의 운동을 돕지만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기에 곧장 돕지는 않는다. 협조는 언제나 반 박자씩 늦다. 이상한 상황이 발생한다. 겉으로 볼 때 민주화의 주적은 박 처장을 위시한 반민주 세력이다. 하지만 서사 진행상 실질적으로 정의 실현을 더디게 만들어 민주화(에 감정 이입한 관객)의 애간장을 태우는 주체는 연희라는 불균질한 조력자다. 서사 장치로서 그녀의 실체는 ‘지연’인 것이다. 이를 의심 없이 구성하면서 영화는 저급한 인식을 부지불식간 승인한다. 정치 현장에서 여성은 장애물이라는 편견이 그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내면 변화는 연희의 몫이지만 이는 결과론에 지나지 않는다. 의외의 설정이 성장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는 연희의 주체적 변화를 환기하는 사연, 체험, 사유를 제법 구체적으로 배치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결단은 성찰적 토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감정적 차원에서 흩어지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이한열 열사와의 가상적 관계 때문이다. 의아한 것은 운동과 관련된 차별적 입장을 가진 두 대학생 사이의 대화, 토론, 논쟁에 영화가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대신 영화는 연희의 성장과 딱히 상관없는 그녀와 이한열의 극적인 만남, 풋풋한 감정, 비극적 이별을 펼치기에 바쁘다. 그 결과 훼손되는 것은 연희의 성장 자체다. 그것은 시시때때로 끼어드는 멜로 감수성에 휘둘리며 소모적인 물음표의 자리로 떠밀린다. 그러니까 그녀의 성장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것인가, 남성과의 감정적 교감에 의한 것인가? 연희가 남자였다면 애초에 성립되지 않을 이 무용한 선택지를 영화는 굳이 부여잡는다. 이한열 열사를 형상화하는 영화의 태도 역시 의심스럽다. ‘1987’은 빠른 영화다. 다양한 인물들이 스치듯 지나가기에 관객 입장에서 그들을 숙고할 여유가 없다.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영화는 역사적 인물을 배우의 스타 이미지로 윤색한다. 우리는 첨예한 김윤석, 의뭉스러운 하정우, 순수한 여진구를 경유하며 역사적 인물들과 접촉하는 것이다. 이 영리한 전략 자체에 불만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늑대의 유혹’의 강동원 이미지로 이한열 열사를 매개하는 태도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비장한 역사를 간단히 상품화시켰다는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무엇보다 이는 ‘운동권 오빠’의 외모에 반해 운동에 참여한 일부 여대생의 존재를, 그것이 남성적 시선으로 각색된 결과일 뿐일지라도, 별다른 의심 없이 공식화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악의적이다. 영화의 삐뚤어진 공식화를 따라 연희는 그만 그 악의적 자리의 대표로 추락한다. 감독에 따르면 ‘1987’의 궁극적 의도는 영화적 사건을 목격한 관객이 주인공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구성하는 것이다. 과거를 다루지만 그 목적은 현재 관객과의 소통인 셈이다. 이때 관객과 가장 가까운 인물은 연희다. 그녀 역시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 구도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 있고, 그녀의 성장 과정 또한 관객의 이입 행로와 겹치며, 관객을 집회 현장으로 이끄는 엔딩의 카메라 시선 역시 연희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희와 관객을 묶는 영화의 진심은 따로 있다. 둘 모두가 그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영화의 설명을 따라 그 사건에 접속해야 한다는 인식 말이다. 연희의 입장에서 이는 난감한 상황이다. 영화가 그녀에게 부여한 나름의 사연이 졸지에 취소되는 것과 동시에 관객과 동일한 자리, 그러니까 역사적 교양을 배워야 하는 자리로 떠밀리는 형국이다. 이 또한 여성에 대한 편견이다. 그 시절을 감내했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무작정 여성은 역사적 객체로서 학습되어야 하는 존재로 고정된다. 그렇다면 거꾸로 그녀를 가르치는 주체는 누구이며, 그 권리는 누구로부터 부여받은 것인가. “내 뒷자리에 있었던 젊은 관객은 그 세대가 아닌데도 울더라. 강동원 때문이 아니었을지.”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어느 남성 평론가가 한 말이다. 이 발언은 젊은 여성 관객을 서사의 행간을 읽지 못하고 그저 배우의 얼굴만 집착하는 존재로 누락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적인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혹시 저 농담 아닌 농담은 여성과 관련된 ‘1987’의 진심과 맞닿아 있는 것 아닌가. 사실상 그것은 연희를 형상화하는 영화의 삐뚤어진 절차를 정확하게 반영한 결론이다. ‘1987’은 승리의 서사지만 이때의 승리는 여성을 서사의 장애물로, 멜로 감수성의 객체로, ‘운동권 오빠’에 환호하는 존재로, 배워야 하는 자리로 떠미는 남성적 민주화의 결과일 뿐이다. 이것이 ‘1987’의 감동에 쉽게 동참해서는 안 되는, 아니 저항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