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

전체메뉴 보기
  • SNS 기사 공유카카오톡으로 보내기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 2018 여성신문 30주년,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

  •  
  • SINCE 1988 : 여성운동 · 페미니즘 · 젠더민주주의

    성평등 사회로 가는 디딤돌,
    ‘여성신문’과 함께 해주세요.

#1. 여러 스탭 앞에서 여성 배우의 뺨을 수차례 때리고, 모욕적 언사를 퍼붓고, 사전 합의 없이 상대 남성 배우의 성기를 잡으라고 강요하고,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하자 일방적으로 하차를 통보한 남성 감독은 어떻게 됐는가. 지난해 8월 한국 사회를 달군 ‘김기덕 감독 사건’은 기이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난달 약식재판 결과 김 감독은 폭행죄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강요, 강제추행치상, 명예훼손 등 다른 혐의는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없음’ 처분이 나왔다. 피해자 측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재정신청을 했고, 소송이 진행 중이다. 김 감독은 최근 베를린영화제에 버젓이 참석해 신작 소개 기자회견을 열었다. 영화제 측은 “모든 형태의 폭력이나 성희롱을 규탄하고 반대한다”면서도, 김 감독이 이미 처벌받았으니 문제없을 것으로 보고 초청했다는 입장을 밝혀 파문이 일었다. ‘영화감독 김기덕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영화제 개막 전날인 지난달 14일, 영화제가 폭력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고 피해자를 고립시켰다고 규탄했다. 가해자가 여전히 ‘잘 나갈 때’, 피해자는 드라마·영화 등 일이 거의 다 끊긴 채 싸우고 있다. 피해자가 주위의 시선과 ‘감히 배우가 감독을 고소하는 게’ 두려워 침묵했던 4년을 두고 ‘꽃뱀론’이 나돌았다. #2. 예술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미성년 제자들을 상습적으로 성희롱·성추행·성폭행한 남성 시인은 어떻게 됐던가. 배용제 시인은 지난해 9월 1심에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징역 8년과 20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선고받았다. 학생들의 대학 입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교사이자 기성 문인의 위치를 악용한 범죄였다. 재판부는 “배 씨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강제추행·간음·준강간을 해 피해자들의 성적 자유를 침해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배 시인은 즉각 항소했다. 2016년 10월 직접 발표했던, “피해를 당한 아이들과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속죄와 용서”를 구하고, 공식 활동을 접겠다던 사과문 내용도 부인했다.(사과문 현재 비공개) 원고 측 대리인 이선경 변호사의 말을 빌리면, “지난주 열린 항소심 마지막 공판에서 배 시인은 범죄 사실을 하나하나 부인했고 오히려 ‘그 애들이 (내 권력을 노리고) 먼저 내게 접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 측은 가중처벌을 요구했고, 항소심 결과는 3월 중 나온다. #3. 술에 취해 잠든 동기 여학생을 성추행하고 이 과정을 촬영한 남자들은 어떻게 됐던가. ‘2011 고려대 의대 집단 성추행 사건’은 피해자가 사건 발생 다음 날 피해 사실을 신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2012년 6월 가해자 박모 씨, 배모 씨, 한모 씨는 징역 1년 6개월~2년 6개월, 신상정보공개 3년과 고지 3년을 선고받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가해자들이 징역형을 받기까지, 그리고 받고 난 후 벌어진 믿기 힘든 일들이다. 가해자들이 구속된 뒤에도 고려대 의대 내에선 ‘젊은 혈기에 그럴 수 있다’ ‘중징계는 가혹하다’는 동정론이 나왔다. 가해자의 부모는 대형 로펌과 고위급 전관 변호사로 구성된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렸다. 또 의대 재학생들에게 ‘피해자에게 인격적 문제가 있다’ ‘평소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루머를 유포했다. 피해자는 가해자 측의 합의 종용과 명예 훼손, 온라인상 신상 유포와 ‘꽃뱀몰이’ 등으로 재판 도중 이미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학 측은 사건을 파악하고 3개월이 지나서야 출교 처분을 내렸다. 2018년 2월 현재, 가해자 둘은 아직 의대에 다닌다. 죄질이 가장 나빠 당시 검찰 구형량보다 1년 더 많은 징역2년6월을 선고받은 박 씨는 2014년 성균관대 의대 정시모집에 합격했다. 같은 시기 한 씨도 모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이들이 의대 본과 1년에 재학 중이던 2016년에야 뒤늦게 이런 사실이 알려졌다. 대학 차원의 특별한 조처는 없었다. 현행 의료법엔 성범죄 전과자가 의사 면허를 취득하지 못하도록 막을 근거 조항이 없다. ‘가해자들은 이미 죗값을 치렀다’는 옹호론도 나왔다. 여성들의 용기로 이어진 미투 한달...폭로 이후가 더 험난하다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이 8년 전 여성 검사를 성추행했다는 ‘미투(#MeToo, 나도 고발한다)’ 폭로가 나온 이래로 한 달째 성폭력 피해자들의 말하기가 이어지고 있다. 유명 연출가, 배우, 인간문화재, 천주교 신부 등 남성 유력 인사들이 가해자로 지목되고, 검사, 국회의원, 극단 대표, 배우 등 주목받는 사회적 위치에 오른 여성들이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거대한 반향이 일고 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2월 26일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 미투 운동 긴급 토론회에서 “이 폭발적 흐름은 사실 많은 이들의 경험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며 “(많은 여성들의) 두려움이 미안한 감정과 자책을 넘어 변화를 위한 결의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난 강남역 살인사건 때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폭로 이후가 더 험난하다. 가해자들은 반성조차 없이,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면죄부를 받는 일이 많다. 2016년 10월부터 들불처럼 일어난 #○○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으로 고발당한 가해자들 대부분은 형사 처벌이나 징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들이 고소를 당해 폭로글을 삭제하거나 힘겨운 법적 투쟁을 이어가는 중이다. 미투 운동의 본질을 흐리는 말들도 자꾸 나온다. 어렵게 피해를 고발한 이들은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거나, ‘뒤늦게’ 폭로했다는 이유로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우리 법의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조항은 억울한 이들의 입을 막는 도구로 악용되기 일쑤다. 젠더 권력에 의한 성범죄라는 사안의 본질에 주목하기보다 선정적인 사건 묘사, 피해자 신상털이 등에 주목하는 대중과 언론 탓에, 피해자는 침묵하거나 더 큰 상처를 받았다고 호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