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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판, 위계에 의한 폭력 만연하지만 사소한 일로 취급되는 경우 많아 성폭력 포함 욕설·닦달·무시 등 모든 폭력적 요소 제거하고 평등 감수성 맞춰야 “영화판은 원래 그러니까 네가 견뎌. 그렇게 예민하면 살아남지 못해.” 성폭력과 막말, 욕설 등 위계에 의한 폭력이 도사린 영화 현장을 두고 많은 영화인들은 이렇게 답해왔다. 한 여성 감독의 증언이다. 하지만 영화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의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영화제작 환경에 만연한 폭력적 요소를 제거하고 상급자가 하급자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미투(#MeToo·나도 말한다)’ 운동의 영향으로 영화계도 새 판을 짤 기회를 갖게 됐다. 영화인들은 영화판이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할 점을 지적하고, 향후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그동안 관행이라 여겨왔던 악습을 끊어낼 때다. 12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센터장 임순례·심재명, 이하 든든) 개소 기념행사와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가 열렸다. 지난 1일 개소한 영화산업 내 성평등 환경 조성 대책기구 든든은 이날 공식적인 출발을 알렸다. 영화인들은 영화계 성평등을 위해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영화 ‘걷기왕’(감독 백승화·2016) 촬영 당시 스크립터로 참여하며 성희롱 예방교육을 제안한 남순아 감독은 영화 현장을 지휘하는 감독의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오목소녀’ 촬영 첫째 날 백승화 감독은 전체 스태프가 모인 곳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촬영장에서 바쁘고 긴장된다는 이유로 소리를 지르거나 욕하는 등 위계폭력을 많이 겪어봤을 것이다. 이번 현장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저부터 조심하겠다. 특히 각 파트 헤드 스태프에게 당부 드린다.’ 촬영장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감독이 이런 당부를 하면 함께 일하는 구성원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번 현장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하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훨씬 적어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소리를 지르거나 위압적으로 현장을 이끄는 사람이 없는 촬영장을 스태프와 배우 대부분이 처음 봤다고 말한 것입니다. 보조출연으로 온 한 배우는 ‘이 현장에서는 욕설, 닦달, 무시가 없어 존중받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을 땐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습니다.” 남 감독은 “시간이 곧 돈인 촬영현장은 빠른 진행을 위해 수직적 구조를 띠고, 개인보다는 영화가 우선된다”며 “장시간 노동은 물론, 어린이 배우와 동물에 대한 권리도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에 문제를 제기하면 ‘영화 환경이 원래 그렇다’ ‘바쁘니까 어쩔 수 없잖아’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또 ‘그렇게 예민해서는 영화판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취급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남 감독은 영화를 위해 다른 건 희생해야 한다는 분위기, 수직적 조직문화가 바뀌어야 성폭력과 위계폭력, 더 나아가 인권침해도 사라질 수 있다고 거듭 말했다. “직급, 나이, 경험 차이에 의한 위계 폭력은 영화 현장에서 자주 일어났습니다. 개인이 조직문화를 만들거나 바꾸기는 매우 힘듭니다. 따라서 변화를 만들 의지를 가진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하고, 변화 방향이 합의돼야 합니다. ‘폭력을 저지르지 말자’는 추상적 합의가 아니라 ‘무엇을 폭력이라고 생각하는지’ 각자의 평등 감수성을 맞추는 게 중요합니다.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제작·투자사는 최소한의 방지책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합니다.” 든든이 영화계 내 성폭력·성희롱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해 영화배우·작가·스태프 등 영화인 749명(여성 62.3%, 남성 35.6%)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52.9%는 ‘영화계에 권위적 문화가 강하다’고 답했다. 특히 여성의 경우 64.2%가 ‘여성은 남성보다 영화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어렵다’고 응답해 영화 현장은 여성 영화인에게 더 녹록지 않음을 알 수 있다.(남성은 이 항목에 37.5%만이 ‘그렇다’고 말했다) 또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적 있다고 답한 비율이 여성은 61.5%, 남성은 17.2%로 드러나 여성의 피해 비율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 가해자는 상당수 남성이었다. 피해자가 여성일 때 남성 가해자는 76.7%(여성 가해자 3.5%)였으며, 피해자가 남성일 때 남성 가해자는 43.5%(여성 가해자 17.4%)였다. 김선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영화계 내 만연한 성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성평등 영화정책’을 실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적 기금의 지원을 받는 감독 성비와 지원을 결정하는 결정권자, 심사위원 등의 성비를 50대 50으로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로는 대표적으로 스웨덴을 꼽을 수 있다. 2011년 안나 세르너는 스웨덴의 영화진흥위원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영화계 내 성불평등 문제 해결을 선언했다. 그는 2015년까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하는 공적 기금의 혜택을 받는 감독 성비를 50대 50으로 올리겠다고 밝힌 뒤 이를 2014년에 달성했다. 김 위원장은 “여성이 인구의 절반인데 왜 남자가 주인공이고, 남성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만 지원하느냐”며 “한쪽 성이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에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성차별, 성폭력을 해결할 수 없다”고 질책했다. 또 그는 영화 제작 환경에서 결정권자 대부분이 남성인 것을 지적하며, 이는 콘텐츠의 다양성도 해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은 “대학의 영화 관련 학과에서는 여·남학생 비율이 50대 50 정도로 동일하다. 그런데 (졸업 후) 갈수록 여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며 “단편영화는 여성 비율이 30, 남성이 70이다. 저예산, 독립영화로 가면 여성이 12%로 줄어든다. 상업영화, 극영화를 제작하는 여성 감독은 5%에 그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많던 여학생들은 지금 어디 가 있고, 상처받은 현장의 여성 영화인들은 그 고통을 누구한테 호소해야 하는지 이 자리를 빌려 묻고 싶다”며 “여러분들이 함께 고민해주셨으면 한다. 특히 영진위 관계자분들, 깊게 생각해주시길 바란다”며 “저희도 여성 후배를 맞이하고 싶다. 한국 영화계가 매력적이고 다양한 콘텐츠 만들어낼 수 있고, (여성 감독이 연출하고, 다양성을 보장한 영화가) 시장에서도 수익 창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든든이 영화계 성폭력 실태조사를 벌이며 함께 진행한 심층면접과 초점집단면접 결과에 따르면, 여성 감독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영화 제작 기회 자체를 제한당하는 성차별을 경험하고 있었다. 든든 측은 “이로 인해 선배 여성 감독의 부재가 심각하고, 이는 신진 여성 감독들에게 롤모델 부재와 인맥 부재를 안겨 악순환을 낳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 여성 스태프는 심층면접에서 “여성 영화인들이 설 자리가 없다. 실제로 어떤 영화는 시나리오가 굉장히 좋다고 영화계 안에서 소문이 났지만,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투자를 못 받았다고 하더라. 그런 현실을 보며 너무 슬프고 화가 났다”고 토로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영화계 내 성평등 환경이 조성되기 위해서는 “든든의 가능성이 보장돼야 하며, 이를 위해선 공적 기금이 탄탄하게 뒷받침돼야 한다”고 짚었다. 특히 임순례·심재명 센터장에게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정도의 결정권을 쥐어주는 등 기본적인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여성들의 울부짖음을 받아 안으려는 적극적인 자세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라면서 “영진위가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에 대한 의지가 정말로 있다면, 김기덕 감독이나 조재현 배우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조 자체를 바꾸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이번 실태조사 분석에 참여한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도 “이번에 시행한 기초조사를 바탕으로 영진위 뿐만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 차원에서 놀라울 정도의 지원을 해야 한다”며 “성평등을 이룩하겠다는 간절한 의지가 없으면 사실상 (그들이 내놓는 대안은) 면피용에 불과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