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

전체메뉴 보기
  • SNS 기사 공유카카오톡으로 보내기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 2018 여성신문 30주년,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

  •  
  • SINCE 1988 : 여성운동 · 페미니즘 · 젠더민주주의

    성평등 사회로 가는 디딤돌,
    ‘여성신문’과 함께 해주세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결혼을 통해 결합한 이성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만을 ‘정상가족’이라는 틀에 가둬왔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가족(the family)은 가족들(families)로 존재해 왔습니다. 한부모 가족, 동성애 가족, 다문화 가족, 1인 가족 등 ‘정상가족’의 틀을 넘어 다양한 형태로 우리 이웃에 존재하는 ‘가족들’을 소개합니다. 강경희 전 한국여성장애인연합 대표 여성 장애인은 그동안 가족관계에서 사회적 관계 형성의 차단의 대상으로 성역할이 규정돼왔다. 몸과 마음이 불편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권리와 선택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에 대해 강경희 전 한국여성장애인연합 대표는 “여성장애인들도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선택이 자유롭고, 사회적으로 모성과 양육에 대한 지원과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강 전 대표는 중3, 중1, 초6 아들 셋을 둔 엄마다. 충북여성장애인연대 대표에 이어 2014년 한국여성장애인연합 공동대표로 선출된 강 전 대표는 그동안 여성 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 생후 6개월 만에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가 불편한 채 일상생활을 해야 했던 그 또한, 비장애인의 세계에서 수많은 한계를 경험한 여성 장애인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남편은 힘든 시절을 함께한 ‘동지’ 같은 존재였다. 한 명도 아닌 남자아이 셋. 특히 연년생이었던 아이를 키우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남편은 기꺼이 ‘조력자’가 아닌 ‘동반자’ 역할이 돼줬다. 당시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남편은 일을 그만두고 육아를 도맡기도 했다. 집에 있는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남편은 현재 청주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당시 저는 충북재활원에서 10년 넘게 일했어요. 시설에서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신청한 유일한 여성 장애인이기도 했습니다. 육아휴직 뒤 둘째를 낳고 3개월의 출산휴가를 받았는데도, 도저히 방법이 없었어요. 제가 일을 그만두면 경력단절이 불 보듯 뻔하니, 남편이 아이들을 돌본 거죠. 사실 그때 제게 일은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어요. 비장애인 세계에서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랄까요.” 남편이 출근한 다음 날부턴 강 전 대표가 다시 육아를 도맡았다. 육아도우미 지원을 받기 위해 충북여성장애인연합과 연을 맺었고 이후 대표로 활동까지 했다. 하루하루가 전쟁통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여성 장애인으로서 ‘평생의 한’이었던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결혼 후 한국방송통신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성공회대 대학원에서 실천여성학 등을 공부했다. 아이가 잠든 밤이면 남편과 책상에 둘러앉아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강 전 대표는 “가끔 아이 손을 잡고 길을 걷는 엄마들을 보면 그때가 떠올라 울컥한다. 다시 한번 그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하면 못할 것 같다”면서도 “지금은 아이 한명 한명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 기쁨, 안도감이 더욱 크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아들 셋은 성격도 제각각이다. 첫째는 태권도, 탁구, 축구 등 모든 스포츠를 좋아하는 ‘만능 재주꾼’이다. 둘째는 선생님의 말을 법처럼 지키는 ‘바른생활맨’, 막내는 집안의 활력을 불어놓는 ‘귀염둥이’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강 전 대표에게 ‘가족’의 의미를 물었더니 “내가 살아갈 근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집에 가면 4명의 남자가 저만 쳐다보고 있어요. 손가락 하트를 날리면서, 사랑 고백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 때마다 힘이 나고 감격에 빠져요. 자고 일어나면 아이들이 제게 안겼다 가는데 오히려 사랑을 받는 엄마가 된 느낌이에요. 지금이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