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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 상대로 재판 벌여 일부 승소한 실화 토대로 만든 영화 ‘허스토리’서 ‘위안부’ 피해자 연기한 배우 김해숙 “배우, 감독, 스태프 모두 처절하게 영화 촬영 임해“ “사과를 해라! 그래야 짐승에서 인간이 된다. 지금 기회를 줄게. 부디 인간이 돼라!” 영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배정길(배우 김해숙)은 법정에서 자신이 겪은 피해를 증언하며 토해내듯 이같이 말한다. 오랜 세월 가슴 속에 묻어뒀던 비밀을 드러내며 일본의 악행을 꾸짖는 그의 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통과 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일본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벌인 관부재판을 소재로 한 영화다. ‘위안부’ 및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과 그들을 위해 함께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1990년대 후반 당시 동남아 11개국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재판 소송 중이었으나 유일하게 관부재판만이 일부 승소를 거둬 국가적 배상을 최초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이번 영화에서 배정길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김해숙을 지난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날 진행된 라운드 인터뷰에서 그와 함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글에는 영화 내용 일부가 포함돼 있다) -영화 어떻게 보셨나요. “사실 영화를 제대로 못 봤어요. 특히 이번 작품은 ‘이렇게 힘들 수 있는 감정이 있구나’ 싶었죠. 영화 촬영을 마치고 5~6개월 동안 아팠어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깜짝 놀랐죠.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맡으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끝나고 나니 원상태로 돌아오더라고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었어요. 무기력하고 무슨 병이 걸렸나 싶을 정도였죠. 그래서 병원까지 가봤어요. 건강검진도 해보고.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무슨 일이 있으셨냐고 묻더라고요. 우울증이 생긴 것 같다고, 약을 드셔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죠. 여행을 한 번 갔다 온 뒤에야 벗어났어요. 그래서 영화를 보면 다시 그 감정에 빠질까 봐 보기 두려웠어요. 제가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그분들(‘위안부’ 피해자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되진 않을까 싶어 두려웠죠. 희애 씨랑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작품 속 내 모습을 보고 ‘나 자신이 부끄러우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발연기만 안 했으면 좋겠다고.” -그럼에도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시나리오를 읽다가 관부재판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았죠. ‘위안부’ 피해 사실과 피해자분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관부재판을 알고 난 후) 너무 대충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머니들이 용기를 내 재판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놀라웠어요. 재판에서 일부 승소했다는 것은 일본이 ‘위안부’와 ‘근로정신대’(에 대한 잘못을)를 인정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여태까지 이 사실을 모를 수 있었을까 의아했죠. 민규동 감독님도 이런 역사적 사실이 너무 놀라워 이 작품을 (감독) 초창기 때부터 준비했다고 하더라고요. (‘위안부’ 피해는) 과거에 머물러있지 않고 지금도 현재진행중이고 앞으로도 이야기돼야 할 아픈 역사예요. 저희 영화를 통해 ‘우리의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많은 분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또 그로 인해 피해자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 마음에서 저도 동참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정길은 ‘위안부’ 피해 신고센터가 마련된 후 한참 뒤에 신고를 합니다. ‘이거 신고하면 배상금 나오나요? 우리 아들 병원비가 필요한데’라고 물으면서. 그때 정길을 연기하는 배우님의 마음은 어땠나요. “정길은 아들을 위해 과거의 아픔을 숨기고 살아왔던 여자예요. 그런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위안부’ 피해) 신고를 했죠.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배정길이란 인물은 너무나 큰 아픔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표정이나 감정 변화가 많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연기할 때는 그 부분에 중점을 뒀어요. 일단 저는 제 자신을 다 내려놔야 했어요. 제 자신을 백지상태로 만들어야 했죠. 배정길이라는 역할 안에 배우 김해숙이나 인간 김해숙이 들어가면 안 됐어요. 철저하게 배정길이 돼야 했죠. 그런데 그분의 마음을 0.001%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분이 살아있지 않으니 혼자 상상하며 그 마음을 이해하고 연기해야 했죠.” -영화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반응들이 나와요. ‘뭔가 바라는 게 있으니 저렇게 난리 치는 것 아니냐’ ‘더러운 여자들의 위령비는 못 세운다’는 식이죠. 너무하다 싶으면서도 현재 우리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현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30여 년 전과 지금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느끼는 바가 있으셨을 것 같아요. “사실 그렇게 넓게는 생각을 못 했어요. 그저 그분들의 아픔과 아직 끝나지 않은 얘기를 배우로서 대신 한다는 생각이었죠. 한 컷 한 컷을 찍으면서, 한 동작 한 동작을 취하면서도 ‘내가 잘못해서 그분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어떡하나, 폐가 되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이 더 많았어요. 그래서 촬영이 진행되면 될수록 힘들었죠. 어떤 날은 촬영장에 나가기 싫기도 했어요. (4번의) 재판 신을 하루씩 나눠 찍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저렇게 처절했구나’ 싶었어요. 한 분 한 분이 모두 저랑 똑같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그분들이 각자 연기할 때 자기가 맡은 캐릭터를 위해 온몸을 다 바치는 걸 봤죠. 저희가 흘리는 눈물은 배우로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어요. 배우뿐만 아니라 감독님, 모든 스태프들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죠. 다들 부담감과 책임감을 갖고 작품에 임했어요.” -이 영화를 계기로 변화한 점이 있으신가요? “세상을 넓게 보게 된 것 같아요. 남의 아픔이나 상처를 내 일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분들의 시선에서 한 번쯤은 생각해보는 사람은 된 것 같아요.” -최근에 ‘위안부’ 피해자의 얘기를 다룬 영화가 많았어요. 그런 점에서 부담도 되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를 꼽으라면 나문희 선생님을 꼽을 정도로 배우로서도 인간적으로도 그분을 좋아하고 존경해요. 사실 ‘아이 캔 스피크’를 너무 보고 싶었죠. 어떻게 보면 저희 영화와 비슷한 영화이고. 그래서 어떤 영화인지, 선생님이 어떻게 연기를 하시는지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았죠. 선생님께 정말 죄송하지만, 영화를 보면 제가 흔들릴까 봐 걱정됐어요. 아무것도 생각 않고 배정길이라는 인물에 집중하고 싶었죠. 배우로서 기본적인 욕심이고 자존심이죠. 선생님도 이해해주실 거예요. 이제 작품이 끝났으니 볼 수 있지요(웃음).” -이번 작품은 여성 배우들이 많은 촬영이었어요. 특히 최근에는 드라마든 영화든 흔치 않은 환경이었을 텐데, 어떠셨나요. “뭘 하든지 서로 챙겨줬죠. 몸이 안 좋으면 뜨거운 차를 갖다 준다거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아주기도 하고. 서로를 마음으로 아껴줬어요. 동병상련의 느낌이었죠. 모든 배우들이 실존했거나 실존하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폐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요. 다들 감정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애썼죠. 우리 영화 자체가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라 함께 모여 수다를 떨거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여유는 없었어요. 대신 짬이 날 때 서로를 보듬어줬어요. 촬영을 하면 할수록 너무 힘들어지니까 우리 잘 버티자고, 쓰러지지 말자고 서로 다독였어요. 오랜만에 여성 배우들이 많아서 배우의 입장으로서는 참 좋았죠. 허스토리가 잘돼서 앞으로도 여성 배우들이 주축이 되는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허스토리’는 ‘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해 그들을 돕는 이들의 연대가 두드러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성 연대 장면을 꼽는다면요? “법정에서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는 장면이요. 한 분 한 분이 배우이자 인간으로서 가슴으로 웃고 울며 걱정해줬어요. 그러면서 각자 그 인물들이 돼 연기하는 걸 느꼈던 것 같아요.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 연대였어요. 제가 법정에 앉아 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건 김해숙이 운 게 아니라 그분의 증언을 들으며 흘리는 눈물이었어요.”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시지만, 이 작품은 배우님께 특히나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뿌듯한 점도 있으실 것 같고요. “저도 그게 참 의문인데, 뿌듯하다거나 뭔가 해냈다는 느낌이 없어요. 저도 처음에는 일생의 역작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근데 촬영을 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사라지더라고요. 지금은 이 영화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뿐이에요. 다만, 평생 잊지 못할 작품이 될 것 같아요. 배우로서 제 연기에 대해서 뭐라고 답을 내릴 수 없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보시는 분들이 평가해주시겠죠. 그런데 평가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오만인 것 같아요. 그저 그분들의 마음을 0.001%라도 표현해냈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눈물). 그 얘기가 전해지면 그때서야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감정을 다른 배우 분들도 느끼신 건가요? “네. 특히 (언론시사회 때) 예수정씨가 했던 말에 공감했어요. 영화가 끝났는데도 먹먹하고, 영화를 보고 나서야 (할머니들의) 용기가 비로소 나에게 뜨겁게 다가온다고. 저도 그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아요. 배우들도 많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요. (피해자분들을 연기한) 나머지 세 분에게 박수 쳐드리고 싶어요. 김희애씨도 물론이고요.” -여성들 주연의 느와르에서 배우님을 보고 싶다는 반응이 많아요. 한국에서도 ‘오션스8’처럼 여성들이 주인공인 느와르 영화가 제작된다면 배우님은 어떤 역할을 맡고 싶으신가요? “누가 그랬죠. ‘여’배우라고 하는 것에 화가 난다고. 우린 그냥 배우예요. 배우로서의 열정은 항상 갖고 있죠. 느와르도 오케이고요. 일단 도둑은 해봤고(웃음). (느와르는) 모든 배우들의 로망 아닐까요. 배우로서 제가 갖고 있는 것들을 나이에 상관없이 표현해보고 싶어요. 저도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제 자신을 알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