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나쁜’ 대통령 덕분에 한국 사회는 역으로 새로운 희망을 본다는 찬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촛불로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이 가능케 한 11월혁명, 시민혁명론이다. 연인원 700만명 이상 모였지만 집회는 완벽하게 평화적이고,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았다. 여성혐오 발언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일어날 수 있는 분만 일어나 달라”는, 장애인을 배려하는 감동적인 발언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도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촛불의 염원을 담아 대통령 탄핵이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감동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혁명’은 좀 너무 나간 표현 아닌가? 무엇을 그렇게 ‘혁명적’인 변화로 볼 수 있는가? 이렇게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현재 광장민주주의가 이룬 성과를 부인할 의도는 전혀 없다. 오히려 혁명을 함부로 사용해 이미 어떤 결론이 난 것 같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을 경계하자는 의미다.

전인권의 애국가가 광장에 감동의 물결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무언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수구보수가 지금까지 오남용해 온 애국심과 광장에서 목격한 애국심 차원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다. 구체제에 저항하는 시민의 모습보다 애국심 가득찬 국민의 모습만을 본 듯한 느낌은 무엇일까? 며칠 뒤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을 들으면서 많은 위로를 받긴 했지만 우리가 국민일까, 시민일까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쓰레기 하나 남지 않은 광장의 모습에 외신의 찬사가 쏟아진다는 기사를 여기저기서 접한다. 우려했던 폭력 사태도 발생하지 않았다. 촛불시위문화가 한류의 하나로 다른 국가에 수출(?)될 전망마저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독자 입장에서 다음 집회에 나갈 때 잘 관찰하시길 바란다. 길에 버린 쓰레기는 줍지만, 쓰레기를 길에 버리지는 않지만 공중에 내뿜고 있는 쓰레기(미세먼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취재차, 경찰차, 어떤 차가 됐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마구 뿜어대는 쓰레기의 존재에 우리는 얼마나 민감한가?

촛불집회에 나가는 사람은 수구보수가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촛불민심을 훼손할 것을 알고 있다. 언론의 관심이 평화롭고 깨끗한 집회에 맞춰져 있음도 잘 안다. 개인으로서 노출은 없더라도 이미 광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이런 의미에서 익명성은 없다. 이를 의식한다는 자체가 분명 성숙한 시민의 상징일 수 있다. 반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다면 시민의 모습은 사라진다. 눈에 보이는 쓰레기보다 더 무서운, 엔진 공회전으로 뿜어져 나오는 미세먼지에 문제제기를 하는 시민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여성과 장애인 혐오‧비하 현상은 11월혁명이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을 가장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이전 촛불광장에서 볼 수 없었던 혐오‧비하 발언에 대한 저항은 분명 가부장적 질서를 바꾸는 혁명의 한 징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혐오‧비하 발언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 및 조치를 얻어낼 수 있었던 이면에는 역시 촛불집회 자체가 익명성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특성에 있다.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 진영 내 성폭력‧성희롱 문제가 생겼을 때 이슈화되지 못한 전례가 많다. 운동의 전선을 흐리고 외부적으로 분열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촛불집회 진행 과정에서 혐오‧비하 발언 문제로 이슈가 분열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신속한 혐오‧비하 발언 금지라는 반응을 얻어낸 것은 아닌가?

지금 광장에서는 꾹 참고 있지만(?) ‘여자는 000한 존재’라는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익명성이 보장된다면 수많은 성숙한 시민이 그냥 평범한 국민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한국사회의 근본적 개조 작업은 이제 시작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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