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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란 없다, 평생 도전만 있을 뿐”

여성운동가에 더해 민주화운동가, 교육자와 사회봉사자로 40여년간 쉴 새 없이 사방팔방으로 뛰어온 송희성 한국여성지도자연합 전남지부 회장(64). 일제시대를 거쳐 근대 한국 사회 격랑기에 성장했기에 그의 여성운동 이력엔 사회·정치운동적 색채가 짙다. 그에 비례해 운동에 대한 애정과 정열 역시 강하다.

은퇴해서 편히 쉴 수 있는 나이건만 송 회장은 지역 농촌여성의 경제자립을 돕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 이제 다소 온건해지긴 했지만 이같은 ‘운동’을 향한 마르지 않는 그의 열정은 과연 어디서 오는 걸까. 그 정점 중의 한 때가 바로 5·18 광주 민주화투쟁 당시일 것이라고 송 회장은 말한다.

“도청으로 몰려드는 시민들의 헌혈 행렬을 정리하고 여성계 인력을 동원해 도청에 집결한 청년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희생자들을 위해 마스크와 장갑을 제작하고…항쟁의 한복판에 겁없이 서 있었죠.

결국 505보안대 지하실에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한 달여 동안 앉지도 눕지도 잠들지도 못하게 하는 모진 고문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제 의지로 견뎌낸 것 같지 않습니다.”

내 여성운동 원천은 아버지의 항일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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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남대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남편 노희관씨와 함께 구속되어 부부가 함께 옥고를 치르는 극히 드문 체험을 하기도 했다. 그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버틸수 있었던 것은 부친 정암 송봉해 선생의 정신이 그에게도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송 회장은 회상한다. 정암 선생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로 의술을 통해 지역사회 해남에 많은 기여를 했었다. 부친은 타계한 지 30여 년만인 99년 8월 15일 광복절날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상을 추서받았다.

송 회장은 집안의 항일 분위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기억하게 만드는 여러 고리 중에 3·1운동 노래들이 가장 선명했다고 회상한다.

“한글이 사라지던 일제치하에서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학교에서도 ‘하이’ 대신‘예’로 대답하고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에게 3.1운동 노래들을 전파하곤 해서 문제아로 낙인찍히곤 했죠.”

대학 진학 후엔 국내 대학 최초로 농촌계몽대를 조직해 학창시절 4년 간 줄곧 농촌봉사활동(농활)을 다녔다. 강원도 일대 화전민과 벽촌·농어민 치료, 야학과 청소년 지도, 밭매기 등 문맹퇴치와 생활개선에 나름대로 주력했다. 한편으론 대학 근처의 신촌역 주변에서 고아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밥을 해 먹이며 머리 속의 이를 잡아내는 등 지역 봉사활동을 생활화했다.

“힘들었지만 대학시절 했던 모든 일들이 결국 제 삶의 평생목표를 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역 봉사활동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당당하게 이 나라의 한 젊은이로 우뚝 서야 한다는 신념을 강하게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도의원에 당선, 전남 여성정책의 기틀 마련에 힘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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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회장은 졸업 후 YWCA 프로그램 간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의 사회경력은 다양한 분야로 확대된다. 정신여자중학교, 옥천중학교 교사를 거쳐 광주 숙문여고(현 송원여고) 교감을 역임하고 광주YWCA 이사 및 회원부 위원장· 공보출판 위원장, 대한여학사협회 광주지부 회장,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광주지회장, 한국지방연구원 광주·전남회장, 5·18 기념재단 여성 대표이사, 전남 5·18 특별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또한 260개 협의회중 유일한 여성 협의회장으로 민주평통 광주서구 협의회장을 지내며 명절 때마다 실향노인을 위한 위로잔치를 열곤 했다.

95년 지방선거에서 전남 도의원에 당선된 것은 그의 삶에 획기적 계기였다. 송 회장은 이미 대학시절부터 현실정치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래서 한강 백사장에서 열렸던 선거유세나 정치집회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고 한다. 이제 도의원으로서 그가 늘 꿈꾸어오던 여성지위 향상과 복지증진을 위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는 문교사회·내무위원으로 활약하며 여성특별위원회를 조직해 위원장이 됐다.

송 회장은 당시 우선적으로 30억원의 여성발전기금을 조성해 여성운동의 밑바탕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이와 함께 농어촌 여성의 위생과 건강, 농촌아동을 위한 유아교육기관 설치, 사회 각 분야별 여성인력 30% 등용운동 및 정책건의(그 결과 농협 이사진에 여성 참여, 농어민 후계자 여성 선정등의 성과를 이뤘다), 각 시·군의 여성자원봉사대에 예산 할당, 여성 노동자의 처우개선 정책, 면 단위별로 농번기 동안 탁아소 설치, 농촌지도소의 농기계 조작 및 수리교육 대상에 여성 포함, 여성을 위한 특작물 재배법과 지역 특산물 제조법 교육 등 여성의 사회진출을 돕는 정책들을 입안해냈다.

전통음식 개발해 농촌여성 경제자립 도와

뿐만 아니라 시간적 여유가 없는 농촌여성들을 위해 골다공증 및 부인암 검사 설비를 갖춘 의료서비스 차량을 순회 검진하게 하는 등 구체적이면서도 피부에 와닿게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을 위한 여러가지 정책들을 개발하고 입안하며 현실화하고자 애썼다. 지난 해 발족한 ‘전라도전통음식보존연구회’도 여성복지를 위한 그의 현실적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연구회의 회장으로서 그는 40인의 전문가와 60인의 자원봉사자를 진두지휘하며 우리 전통음식의 과학적 우수성을 홍보하느라 여념이 없다. 연구회는 특히 참신한 발상으로 농촌 여성인력의 경제자립을 돕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다가오는 2월에는 ‘남북여성 하나되기 운동’의 일환으로 남과 북의 음식문화 비교연구와 전시를 위해 방북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송 회장은 63세 나이로 지난 해 2월 호남대에서 늦깎이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에 앞서 99년 8월에는 조선대에서 지방자치학으로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2년여 동안 조선대와 호남대 강단에서 여성학 강의로 ‘여성사회와 법률’을 강의하며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평등의식을 늘 새롭게 불어넣어 주고자 고심한다. 지난 해 12월엔 북한의 선거제도 관련 연구논문으로 아태평화재단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해 용기를 얻기도 했다.

이처럼 송 회장은 늘 일복이 넘친다. 그러기에 그는 지금도 2시간 정도의 수면 밖에 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익숙하고 또 행복하단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생각하고 배우는 여성, 사회와 이웃을 위해 자기시간을 할애할 줄 아는 여성, 남성과의 평등을 위해 인격과 실력을 동시에 기르고자 노력하는 여성이 바로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입니다. 부족하지만 그렇게 살고자 최선을 다해왔죠…”

<목포지사=김종수 통신원 dotchy2001@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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