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휘/문화평론가, haja센터 기획부장, CBS MC

크리스마스와 함께 젊은 세대의 양대 명절로 굳게 자리잡은 날이 바로 발렌타인 데이(2월14일)다. 워낙에 장사속 이벤트가 판을 치는 날이긴 했지만 제과·선물업계의 매출만 매해 200억원대를 넘나드는 시장이라니 싫은 소리 좀 한다고 해서 사그러들 날이 아니다. 백화점, 할인점, 인터넷 쇼핑몰은 물론 호텔, 놀이공원, 동사무소, 분식집까지 발렌타인 데이 마케팅에 나서는 등 이해 당사자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진다.

이쯤이면 “발렌타인 데이가 뭐길래?”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때가 이미 지났지 싶다. 그 옛날 유래나 일화를 들먹이자는 소리가 아니다. 해마다 똑같이 기원을 복습할 이유도 없고 그런다고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는 것 같지도 않다.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는 지식인 사회의 일회성 질책도 때가 되면 되풀이하는 구색용 멘트 같아 건질 게 별로 없기는 마찬가지다. ‘외래 명절’이라는 잣대 역시 녹슨 칼에 불과하다. 빼빼로 데이(11월11일)와 에이스 데이(10월31일)처럼 14일 시리즈를 벗어난 날짜에 국산 제과업체가 지정한 이벤트를 ‘토종 데이’라고 명명하는 영업 담당자의 ‘애국심(?)’을 칭송할 것인지 생각해보면 비판의 논거로서 마땅치 못한 것 같다.

이제는 시점을 바꿔보자. 공급자 입장과 소위 여론의 논리에서 수요자의 위치로 자리를 옮겨보자는 소리다. 발렌타인 데이의 수요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사회 문화적 맥락을 읽고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알다시피 생활은 문화와 동떨어져 ‘돈 버는 행위’가 되었고, 문화는 생활과 분리되어 ‘돈 쓰는 것’이 되었다. 이처럼 소비가 문화의 주축을 차지한 이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원리 한가운데에 발렌타인 데이가 있다.

하지만 10대들이 이런 ‘데이 문화’에 집착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다른 데에 있다. 12년간의 줄세우기 교육 체제에 맞춰 사는 아이들이 발렌타인 데이 같은 ‘사랑 고백 선물하기 이벤트’에 민감한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아이들더러 제 이성 친구에게 고백도 하고 선물도 하라고 권해본 부모나 선생이 있었는가 말이다. 기껏 용돈이나 줘서 내보내거나 오직 대학이 살길이라고 모든 욕구를 유보시킬 줄이나 알았다.

이런 환경이라면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어도 생활에 활력을 주는 즐거운 날”이라고 응답하는 아이들이 훨씬 현명한 편이다. 어른들은 대량 생산되는 선물용 초콜릿의 위생이나 적정한 소비자 판매가를 걱정하면 그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뿐일까? 발렌타인 데이는 남녀간의 사랑 만들기를 이벤트로 만든 것인데, 소비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인간관계의 고유한 추억마저 대량 생산된다고 생각하니 조금 찝찝해진다.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리 엄마 아빠는 레드 제플린 콘서트에서 만났대” 하던 이야기가 “우리 엄마 아빠는 발레타인 데이 때 만났대”로 대체되어 미래의 수많은 아이들이 똑같이 2월14일을 기억하는 광경은 좀 지나친 상상일까? 아이들이 일찍부터 남녀간 사랑의 감정과 관계부터 다양한 체험을 하며 자라지 못하는 한 우리는 더 많은 ‘데이’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그런 날은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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