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자신을 주장할

방법은 함께 모이는 것뿐

‘여성운동’이란 우산이

비바람 가릴  수단될 것

 

 

숫자가 뭐 그리 큰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한국 역사에서 1987년과 2017년은 닮은 점도, 다른 점도 많다. 독재와 권위주의 정치 권력에 맞서 시민혁명이 일어났고 민주주의를 수립하기 위한 국가 제도와 기구들의 혁신도 시작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87년은 민주주의의 형식과 절차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이뤄졌다면, 2017년은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을 실현하기 위한 실험이 진행 중이다. 87년 우리는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고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았고 노동권과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을 제정했다. 2017년 지금은 시민의 힘으로 정권이 교체됐고 검찰과 경찰, 국정원 등 공권력을 집행하는 기구들의 개혁이 진행 중이며 최저임금 1만원을 향한 여정이 시작됐다.

 

여성운동은? 물론 그런 변화의 한 가운데 서 왔다. 민주주의를 향한 실천의 중심에서 법과 제도, 정책을 바꿔 왔다. 때론 연대로 때론 독자적으로 ‘끼어들기’와 ‘새판짜기’를 고민하며 오래된 가부장적 젠더 레짐에 균열을 내 왔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남녀고용평등법’ ‘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특별법’ ‘성매매방지법’ ‘양성평등기본법’ 등이다. 그리고 2017년 우리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헌법을 수정하고 차별금지법을 요구하며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고심 중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사실은, 지금 여성운동은 어떤 하나의 프레임 안에 가둘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깊어졌다는 점이다. 평화, 환경, 풀뿌리 민주주의, 대안 경제는 물론 성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억압적인 사회 환경을 고쳐 평등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실천에서 앞장서고 있다.

 

 

지난해 3월 5일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원들이 3·8세계여성의날 기념 거리 행진 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해 3월 5일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원들이 3·8세계여성의날 기념 거리 행진 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30년이란 시간은 사회와 운동뿐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삶도 바꿔 왔을 것이다. 80년대 대학을 다니고 20대 후반에 87년을 맞고 이제 50대 후반을 살고 있는 필자도 여성운동의 세례를 받고 여성주의를 두고 평생 고민할 기회를 얻었다. 30년 전 고달픈 시간강사들이 모여 밤늦게까지 여성주의를 토론하다가 선배의 지갑을 탈탈 털어 치킨 몇 조각을 나눠 먹으며 맥주를 마셨던 사당 시장의 추억도 그립다(그때 지갑을 털어 우리의 목마름을 채워 주었던 선배가 지금 여성학회장으로 일한다).

문제는 후배들이다. 불과 두서너 해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 코스프레’로 자신을 감춰야 했던 페미니스트 후배들이 2016년 이후 당당한 세력으로 나서고 있어 다행스럽다. 그러나 이들이 ‘여성혐오’의 아주 오래된, 의식과 무의식에 깊이 각인된 집단의식에 맞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으려면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며칠 전 자신이 일하는 부처의 수장이 여성임에도(어쩌면 그래서 더 낡은 이빨을 드러냈는지도 모르지만) ‘여자는 열등하다’는 성차별적 발언을 두려움도 수치심도 없이 표출하는 외교부 국장의 발언을 읽고 나는 오히려 그 밑에서 일하는 여성공무원들이 걱정스러웠다. 성평등을 향한 작은 조치에도 분노하며 적의를 드러내는 남성들이 그들의 화살을 돌릴 곳은 아직 발언권을 갖지 못한, 지위와 연령이 낮은 여성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에서도 소수자의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자신을 주장할 방법은 함께 모이는 것뿐이다. ‘여성운동’이란 우산만이 비와 바람과 태풍을 가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성평등에 대한 저항과 거부는 여성들의 실천이 성공적일수록 더 강해질 수 있다.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단체들의 30주년 생일잔치가 이어지고 있다. 기쁘고 감사하고 축하드린다. 운동과 함께 30년을 살아온 언니들이 이제 고민해야 할 지점은 후배들의, 딸들의 미래다. ‘자매애(sisterhood)'라는, 나를 페미니즘으로 이끌었던 아름다운 말을 떠올리며, 앞으로 30년간 자매애를 키워갈 여성운동의 과제는 무엇인지 함께 토론할 것을 제안드린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