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권리 상실 삼각지대, 준강간’ 토론회

술·약물 이용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 심각

준강간 피해자, 수많은 ‘합리적 의심’ 시달려

협소하게 해석하는 사법기관 대응도 문제

 

‘술도 먹고 너도 먹고’. ‘남친이 주는 작업주를 먹자. 너희들은 먹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국내 술집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문구들입니다. 술이나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을 ‘데이트 비결’ ‘농담’으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증거겠지요. 그러나 이는 형법상의 ‘준강간’,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하는 범죄입니다. 우리 법은 ‘폭행 또는 협박’이라는 수단(형법 297조 강간)을 사용하지 않아도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는 준강간 범죄의 특수성을 고려해 별도의 법조항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준강간 범죄의 법적 해결은 쉽지 않습니다.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성폭력을 당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는 으레 비난과 의심을 받습니다. 2015년엔 단순히 ‘필름이 끊긴’ 상태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이 아니라는 법원의 해석이 나와 논란이 일었습니다. 의식도 잃고, 몸도 못 가누는 완전한 만취 상태만을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으로 보겠다는 겁니다. 준강간 피해자는 왜 이토록 수많은 ‘합리적 의심’에 답해야만 할까요? 19일 한국성폭력상담소는 ‘피해자 권리 상실 삼각지대, 준강간’을 주제로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이날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이은의 변호사, 추지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이 발제한 내용을 기초로, 준강간 피해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사법기관의 대응에 대한 비판을 Q&A 형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19일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서울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에서 ‘피해자 권리 상실 삼각지대, 준강간’을 주제로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 토론회’를 열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사회를 맡았고,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이은의 변호사, 추지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발제를 했다. 페미니스트 의사 이원윤 씨, 배복주 장애여성공감 대표, 최영지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 김홍미리 여성주의 연구활동가가 토론을 벌였다.
19일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서울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에서 ‘피해자 권리 상실 삼각지대, 준강간’을 주제로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 토론회’를 열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사회를 맡았고,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이은의 변호사, 추지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발제를 했다. 페미니스트 의사 이원윤 씨, 배복주 장애여성공감 대표, 최영지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 김홍미리 여성주의 연구활동가가 토론을 벌였다.

Q. 피해자는 “술에 취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더니, 이후 기억이 조금씩 떠오른다며 피해를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피해자의 진술 이외의 증거는 없는데,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 술이나 약물에 의한 강간의 특성상, 많은 피해자들이 피해 당시, 혹은 전후의 맥락을 불완전하게 기억합니다. 피해자 진술 외의 증거가 부재한 상황에서 진술의 신빙성은 바로 그 맥락들에 의해 판단돼야 합니다. 

하지만 사법기관은 준강간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 과도하게 협소한 해석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피해자에게 ‘피해자답지 않다, 혹시 무고 아니냐’며 협박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Q. “피해자는 잠에서 깨어나 피고인의 성행위 모습을 지켜보면서 성행위가 끝날 때까지 10여분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기만 하였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의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통상적인 성폭행 피해자의 행동’과 사뭇 달라 보입니다. 성폭행 피해자라면, 보통은 즉시 저항하거나 주변에 피해 사실을 알리려 하지 않을까요? 

- 많은 준강간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해 사실을 의심받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즉각적인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준강간 피해자의 54%가 피해 상황에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로 ‘당황해서’를 꼽았습니다. 뇌과학적 연구 등에 따르면, 공포를 느끼는 순간 저항하지 않거나 극도로 수동적으로 변하는 대응 방식은 인간이 위험에 대응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반응입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이 2013년 9월부터 2년간 성폭력 피해 여성 23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준강간 피해자의 54%가 피해 상황에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로 “당황하여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서”라고 응답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이 2013년 9월부터 2년간 성폭력 피해 여성 23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준강간 피해자의 54%가 피해 상황에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로 “당황하여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서”라고 응답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Q. 피해자는 피해 직후에도 가해자를 탓하는 듯한 언행을 하지 않았고, 가해자와 함께 식사를 하는 등 함께 시간을 보내다 헤어졌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피해자의 행동’으로 보기 어렵지 않나요? 

- ‘진짜 피해자라면 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모르는 사람이 저지르는, 극단의 폭력을 수반하는 강간’을 성폭력의 전형으로 보는 관점이 전제돼 있는데요. 준강간의 경우, 어느 정도의 신뢰관계가 존재하거나, 가해자와 당일 처음 만난 사이여도 함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거나 상당 시간 대화를 통해 상호작용이 있었던 관계가 대다수입니다. 아는 사이에서의 신뢰는 가해자의 말이 곧 성관계에 대한 요구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고, ‘의심’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이미 술을 함께 마시며 경계심이 누그러뜨려져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준강간 피해자들은 피해 상황을 인식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피해를 성폭력으로 명명하는 데에 몇 개월, 몇 년이 걸리기도 하죠. 실제로 “피해 상황에서 그것을 성폭력이라 바로 인지하지 못해 즉시 대응하지 못했다”는 준강간 피해자가 전체의 45%에 달했습니다. 준강간 피해자들이 “내가 경험한 일이 성폭력 피해라는 설명을 받은 게 도움이 됐다”고 응답한 경우 역시 다른 유형의 성폭력 피해자들에 비해 훨씬 많았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이 2013년 9월부터 2년간 성폭력 피해 여성 23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준강간 피해자의 약 60%가 주변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이유로 “결국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게 될까봐”라고 응답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이 2013년 9월부터 2년간 성폭력 피해 여성 23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준강간 피해자의 약 60%가 주변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이유로 “결국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게 될까봐”라고 응답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Q.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면, 조심하지 않은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나요? 모텔이나 집에 함께 들어가다니, 사실상 성관계를 허용한 게 아닌가요?

- 그러한 사회적 통념이야말로, 준강간 피해자들이 피해를 인지하고도 즉시 도움을 요청하거나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게 막는 주된 요인입니다. 실제 준강간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안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할 것”(60.6%)이라는 생각 때문에 피해 대응에 소극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은, ‘다른 성폭력 피해 여성에 비해 성관계가 난잡하거나 문제가 있다’, ‘가해자를 유혹하거나 유발했다’ 등의 비난을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보다 더 많이 경험합니다. 

‘모텔이나 집에 함께 들어간 것은 성관계에 동의한 것’이라는 믿음은 남성 중심적인 통념이기도 합니다. 성관계 경험이 전무한 여성의 경우, ‘모텔에서 좀 쉬다 갈래?’라는 말이 곧 성관계 요구임을 ‘알아채지’ 못하고 신뢰할 가능성이 더욱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요즘도 술집에는 여성 대상 성범죄를 부추기는 홍보 문구를 버젓히 사용하는 곳들이 있다. 사진은 지난해 온라인에서 확산되며 많은 비난을 받은 국내 모 술집 내부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요즘도 술집에는 여성 대상 성범죄를 부추기는 홍보 문구를 버젓히 사용하는 곳들이 있다. 사진은 지난해 온라인에서 확산되며 많은 비난을 받은 국내 모 술집 내부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Q.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합의금을 요구하거나, 가해자의 합의 요구에 응해 합의금을 수령했다면, ‘꽃뱀’일 가능성이 높지 않나요?

- 피해자들은 다양한 맥락에서 합의금을 수령, 거부하기도, 요구하기도 합니다. 법적 공방이 힘들고 싫어서 합의금을 받고 사건을 종결하고 싶어 하는 피해자도 있고, ‘한 남자의 인생을 망쳐버리고 저는 멀쩡히 산다’고 비난받는 게 두려워 합의를 고민하는 피해자도 있습니다. 조사 결과, 준강간 피해자가 “거짓신고로 오해할까봐 합의금을 포기했다”고 답한 비율이 다른 유형의 성폭력 피해자들보다 더 높았습니다. 합의에 응하지 않을 경우 가해자들이 보복할까봐 두렵다는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Q. 가해자가 피해자와 성관계를 가진 사실을 적극적으로 은폐하려 하지 않았다면요? 사용한 콘돔을 그대로 버려두고, 피해자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집이나 병원까지 바래다주기도 했다면, ‘가해자의 태도’로 보기 어렵지 않나요?

- 법원은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택시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거나 병원, 약국 등에 동행했다는 점 등을 들어,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하거나 가해자의 범해 의도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평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가진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해석해 감형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이는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로맨스와 폭력 사이를 넘나드는 남성들의 행위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것으로밖엔 보기 어렵습니다. 가해자가 가진 왜곡된 성적 규범이나, 피해자를 무시하는 태도를 ‘우발적’ 행위로 볼 수는 없습니다. 

법률과 법 해석이 이미 남성의 경험에 기반해 이뤄지고 있습니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 사실의 입증 책임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위와 같은 ‘피해자다움’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도록 요구받습니다. ‘가해자다움’을 요구받는 가해자는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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