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배우A 성폭력 사건’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이 나왔다. 1심의 무죄 선고를 뒤엎고, “성행위 또는 성폭력과 관련한 연기에 있어 사전합의의 중요성을 보여준” 판결이라는 평이다. 그간 ‘#영화계_내_성폭력’의 이름으로 터져 나온 고발들에 대한 의미 있는 ‘응답’이기도 하다. ‘남배우A 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그간의 흐름과 기대, 과제를 간략히 정리해봤다. 

 

무슨 일이 있었나

2015년 4월, 배우 조덕제 씨와 피해자는 극중 술 취한 남편이 아내를 성폭행하는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피해자는 ‘어깨 부근만 드러나는 수준이며 다른 노출은 없다’는 내용에 합의한 후 촬영에 임했다. 조 씨는 감독이 자신에게 ‘상대 배우를 과격하게 다루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카메라가 돌아가자, 조 씨는 피해자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며 상의와 속옷을 찢어서 상체를 만졌다. 피해자는 조 씨가 자신의 바지 속에 손을 넣어 하체까지 만졌고, 전치 2주에 해당하는 좌상과 찰과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촬영 직후 피해자가 감독과 조 씨를 불러 항의하자, 조 씨는 “내가 연기에 몰입했다. 너도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됐지? 이제 다음 장면 찍자”고 말했다. 

이후 피해자는 피해상담기관을 거쳐 2015년 5월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했다. 조 씨는 강제추행치상과 무고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해 12월 열린 ‘남배우A 사건’ 1심 재판에서 검찰은 조 씨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다. 

1심 재판부는 조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저예산 영화가 갖는 한계 및 제작진의 준비 소홀 등으로 조 씨는 해당 촬영 당시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 설명을 듣지 못한 채 배역에 몰입한 연기를 했”고, “당시 행동은 업무상 행위이므로 성폭력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피해자 측은 해당 영화의 제작진이 ‘조 씨의 행동을 연기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하는 내용의 녹취자료를 증거로 제출했지만, 재판부는 피해자가 “억울한 마음에 상황을 다소 과장하여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이를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피해자를 ‘애드리브도 모르는 배우’ ‘꽃뱀’이라 부르는 말들이 업계에 퍼졌다. 조 씨는 피해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맞고소했다. 

 

공동 대응 나선 여성·영화단체 “영화는 예술 아니라 노동”

여성들의 ‘방청 연대’도 이어져

한국여성민우회 등 11개 여성·영화 단체는 3월8일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1심 판결을 비판했다. 이들은 ‘영화는 예술이 아닌 노동’임을 강조했다. “피해자와 피고인이 해당 씬에 대해 다르게 인지하고, 사전에 합의한 내용과 전혀 다르게 폭행과 추행이 일어난 상황”이며, “저예산 영화라는 이유로 연기에 대한 충분한 소통과 합의과정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영화 촬영 과정의 특수성이 아니라 잘못된 관행이며, 합의되지 않은 ‘연기’는 ‘배역에 몰입한 연기’가 아니라 ‘연기를 빙자한 폭력’”이라고 비판했다.

5월 11일엔 88개 단체가 영화계 내 성폭력 근절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남배우A 사건은 지금 영화계의 문제를 넘어서서 앞으로 영화를 만들어 나갈 수많은 영화인들을 위해 올바른 선례를 남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영화계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계 전반의 노동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더 이상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꿈을 포기하고, 폭력을 경험하지 않도록 힘을 실어 주십시오.”

 

지난해 12월 6일 열린 2016 서울독립영화제 토크포럼 ‘#STOP_영화계_내_성폭력: 영화계 성평등 환경을 위한 대안 모색’ 현장. ⓒ변지은 기자
지난해 12월 6일 열린 2016 서울독립영화제 토크포럼 ‘#STOP_영화계_내_성폭력: 영화계 성평등 환경을 위한 대안 모색’ 현장. ⓒ변지은 기자

어떤 여성들은 ‘방청 연대’에 나서서 재판부를 압박했다. 항소심 2차 공판이 열린 5월 13일, 재판정엔 피해자를 지지하는 여성 80여 명도 참석했다. 6월28일 열린 3차 공판 때도 여성 수십 명이 재판을 지켜봤다. 보통 성폭행 사건 판결은 2차 피해를 우려해 비공개로 진행하는데, 피해자는 “지금도 영화계 내에는 연기를 빙자한 성폭력 사건이 빈발하고 있다. 이를 바꾸려면 더는 숨을 수 없다”며 2심부터 재판 공개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간 재판에 동석한 ‘여경’ 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사무국장은 “피해자를 지지하는 방청객들이 늘면서 재판부도 이 사건의 중요성과 높은 사회적 관심을 인지하게 된 것 같다. 방청객의 이해를 돕고자 평소보다 더 상세히 설명하는 모습 등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다. 피해자도 ‘나 혼자만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니 힘이 난다’고 했다”고 밝혔다. 

 

한국여성민우회 여성연예인인권지원센터와 씨네21은 지난 1월 16일 서울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영화현장에서의 성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알리고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긴급포럼-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를 열었다. ⓒ변지은 기자
한국여성민우회 여성연예인인권지원센터와 씨네21은 지난 1월 16일 서울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영화현장에서의 성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알리고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긴급포럼-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를 열었다. ⓒ변지은 기자

항소심은 유죄…“연기를 빌미로 한 범죄”

여성·영화 단체 “예술 미명하에 벌어지는 성폭력 묵인하지 않은 판결” 환영

항소심에서 조 씨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고법 형사8부는 지난 13일 조 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했다. 조 씨의 행위를 “배역에 몰입한 연기”로 본 1심과 달리, 항소심은 “연기를 빌미로 한 범죄행위”라고 판결했다. “피해자의 바지에 손을 넣은 것은 감독의 지시사항에도 없던 일이고, 촬영도 얼굴 위주로 이뤄져 정당한 촬영으로 이뤄진 행위라 보기 어렵다. 여러 사정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이 계획적, 의도적으로 촬영에 임했다기보다 순간적, 우발적으로 흥분해서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인다. 그러나 추행의 고의가 부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조 씨는 “피해자가 진술을 수차례 번복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 주요 부분은 일관되고 구체적이다. 불합리하고 모순되는 부분이 없다. 허위 진술을 할 특별한 정황이 보이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여성영화인모임 등 6개 여성·영화 단체는 이날 논평을 내고 이번 판결이 “자칫 연기 혹은 예술의 이름아래 벌어지는 성폭력을 묵인한 지난 1심 무죄 선고를 파기했다는 점, 그 어떤 예술성도 인권위에 존재할 수 없다는 상식 아래 성폭력을 예방하고, 성폭력이 발생했을 경우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며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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