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직무배제 뒤 24일 사퇴

서울시 “사실이면 해당 사회복지법인

전수조사·10년간 시설 운영 금지”

한여사회 “여성 사회복지사 성폭력

피해 심각…용기 낸 피해자 응원”

 

한국여성사회복지사회는 지난 18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비정규직 여성사회복지사에게 가해진 성희롱 사건 진정’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국여성사회복지사회
한국여성사회복지사회는 지난 18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비정규직 여성사회복지사에게 가해진 성희롱 사건 진정’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국여성사회복지사회

사회복지기관장이 계약직 여성 사회복지사를 약 10개월에 걸쳐 10차례 이상 성추행·성희롱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정규직 일자리를 제안하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고, 해당 복지관 직원들도 사건을 은폐하려 시도했다”는 고발도 나왔다. 이 여성은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고, 인권위는 조사에 착수했다. 해당 기관장은 24일 사퇴했다. 

25일 한국여성사회복지사회(한여사회)와 서울시 관계자의 설명을 종합하면, 서울시에 있는 한 노인종합복지관 관장 A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8월 말까지 약 10개월간 계약직 사회복지사 B씨를 10차례 이상 성추행·성희롱했다.

B씨는 대학 4학년 졸업 직전인 지난해 11월 말경 이 복지관에서 계약직 사회복지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관장 A씨는 지난해 12월 A씨가 참여한 첫 회식부터 지난 8월 회식까지 여러 비공식 모임 자리에서 A씨에게 부적절한 언행을 했다. A씨는 B씨가 비정규직임에 주목해 “(정규직에)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고, 회식에 불참하겠다고 하면 “기회를 잃었다, 넌 아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B씨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수치스러웠고 두려움에 휩싸였다”고 밝혔다. 일부 직원들은 A씨의 언행에 적극 동조하며 피해를 방조했다. “팀장님들도 저를 감싸주기보단 회식에 참여하기를 유도했습니다. 저를 직원으로 대하는 것인지 여자로 대하는 것인지 회의감이 많이 들었고, 첫 직장에서 이런 일을 겪다보니 앞으로 제가 이 일에 종사하며 살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듭니다.” 

B씨는 지난 8월 A씨가 저지른 성희롱·성추행을 고발하는 내용의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기관 담당자는 고발 내용을 “개인사유”로 수정해 수리했다. A씨는 B씨가 퇴사한 뒤로도 지속적으로 연락해 ‘용서해달라’고 했다. 심지어 B씨에게 같은 법인 내 다른 복지관의 정규직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B씨는 한여사회를 찾아가 “너무 두렵다. 그런 사람이 복지기관의 기관장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 꼭 심판을 받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한여사회는 지난 18일 인권위 앞에서 이 사건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고 진정서를 제출했다. 

인권위를 통해 진정 내용을 파악한 서울시는 즉시 해당 복지관을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에 A씨를 직무 배제하라고 요구했다. A씨는 지난 20일부터 관장 자리에서 배제됐고, 24일 사표를 제출했다. 인권위 담당 조사관에 따르면 “A씨의 면직 처리 여부는 조사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서울시 인생이모작지원과 관계자는 “만약 인권위 조사 결과 피해가 사실로 드러난다면, 복지관 협약서에 따라 해당 법인의 서울 시내 시설을 전수 조사하고 10년간 시설을 운영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권위의 2013 사회복지사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는 피해자가 피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적절한 대응을 하기 어려운 조직 문화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인권위원회 2013 사회복지사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
인권위의 2013 사회복지사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는 피해자가 피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적절한 대응을 하기 어려운 조직 문화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인권위원회 2013 사회복지사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

사회복지 종사자들이 노동 과정에서 경험하는 성폭력과 인권침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인권위가 2013년 전국 1057개 기관·시설 종사자 260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의 99.2%가 동료와 상사, 민원인으로부터 폭언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체적 폭행(19.2%), 성폭력 피해(17.2%)를 겪었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사회복지 종사자들의 노동 조건은 ‘많은 업무량, 적은 임금, 인력부족’으로 요악할 수 있다. 인권위 조사 결과 사회복지사의 인권보장 수준은 10점 만점에 평균 5.6점에 불과했다. 

한여사회는 이번 사건을 “‘갑’인 남성 원장이 ‘을’인 여성 비정규직 복지사를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른 사건”으로 보고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는 한편,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에 △여성 사회복지사의 인권을 보호하는 성평등 업무환경 보장 △여성사회복지사에 대한 성추행과 성희롱을 근절할 강력한 조치와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장명숙 한여사회 인권위원장은 “사회복지 분야는 여성 비율이 높고 소명·희생 의식이 강요되는 업계다. 여기서 여성은 철저히 ‘을’이다. 성폭력 사건이 비일비재하지만, ‘나 하나 입 다물면 그만 아닐까’ 하는 인식이 만연하다. 지난한 싸움이 되겠지만, 비정규직에 성희롱·성추행 피해자인 여성이 ‘내가 이 고리를 끊어야 하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 자체가 굉장한 용기”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