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들어왔다. ‘성희롱·성폭력 고충상담원 등 조력인인 제3자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분명히 징계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되는데, 정작 피해를 입은 당사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면 이때는 어떻게 해야 옳은 건가요? 심각한 성희롱·성폭력 피해로 여겨지는데, 그렇더라도 피해자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건가요?’

답하기에 참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정말 반가운 질문이기도 하다. 대처가 필요한 상황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를 인지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가만히 있겠느냐는, 그래도 무언가는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느냐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주변인들이 적지 않은데 무언가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잘못을 지적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안타깝지만 똑 부러지는 최선의 답은 아직은 없는 것 같다. 한 가지 선택지의 예는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있다. 이 법 제32조 제1항 제3호에 따르면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국가인권위원회에 그 피해사실에 관해 진정을 접수했지만 피해자가 조사를 원치 않는 것이 명백한 경우에는 그 진정을 각하하게 돼 있다. 서울대 인권센터의 경우에도 위와 같은 예를 따라, 동일한 신고 각하 규정을 마련해 두고 있다.

피해자가 신고하기를 원치 않고, 조사 진행에도 협조할 마음이 없다면 조사하는 사람으로서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성희롱·성폭력 사건의 조사에 있어서 피해자 진술이 갖는 증거 가치는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선 질문의 근본 취지는 이미 확보된 증거 등에 비춰 객관적으로 처벌이나 제재의 필요성이 인정될 수 있는 상황임에도 피해자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자를 가만 놔두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하는 점에 있다. ‘네. 그냥 가만 놔두시지요’ 라고 속 편히 답하기에는 꺼림칙한 생각이 큰 것도 또한 사실이다.

필자가 자문위원으로 있는 포항공대에서는 ‘성희롱·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을 전부개정하면서 ‘국가인권위원회법’과 동일한 신고 각하 규정을 마련해 두는 대신, 다음과 같은 나름의 타협적 대안을 강구해 보고자 했다. 피해자 아닌 사람이 신고한 사건에서 피해자가 조사를 원하지 않음이 명백한 경우라도 혐의사실의 중대성과 명백성이 인정되고 피신고자가 그다지 뉘우치지 않고 있다고 판단되는 때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그 신고를 즉시 각하해 버림으로써 절차를 종결짓지 않고, 피해자 면담 등 적절한 방법으로 조사 진행의 필요성 등을 설명하면서 상담한 후 피해자의 의사를 다시 확인해 신고의 각하와 절차 종결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것으로 정했다.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물론 가장 중요할 뿐더러 사건 처리의 방안으로서도 가장 안전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제재 필요성이 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가 멀쩡하게 활보하고 다니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도 우리의 정의감과 공익적 요구에 반하는 일이다. 성폭력범죄에 대한 친고죄 규정이 폐지돼 고소 없이도 수사가 가능할 수 있게 허용한 입법적 결단에도 아마 이와 비슷한 고민이 깔려 있었으리라.

근본적으로는 피해자가 왜 신고와 조사 진행을 꺼리고 있는지를 조심스레 접근해 확인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행여 피해자가 괜한 우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라면 이를 떨쳐낼 수 있도록 조력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피해자의 걱정이 실제로도 이유 있는 것이라면 불안감을 야기하는 요인들로부터 피해자를 더욱 적극적으로 보호해 줘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가능한 선택지와 사건의 향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최대한 상세하게 제공해 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사건의 신고와 조사 진행을 원치 않는다면, 그 선택을 존중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다만, 조사하려는 사람의 연락을 받는 것조차 처음부터 극도로 꺼려하고 싫어하는 피해자라면 자세한 설명과 그 의사의 확인을 위한 상담을 권하는 것 자체가 추가 피해를 유발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은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함에도,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했을 때 그것이 오히려 피해자에 대한 부당한 비난이나 잘못된 소문, 가해자 또는 가해자 주변인들로부터의 유·무형의 보복 등 더 큰 추가 피해로 이어져 피해자를 아프게 하는 일들이 이제껏 너무나 많이 있었고, 지금도 근절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피해자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들 모두의 잘못이다. 더 많이 배려해 주지 못해서, 더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우리가 말해야 한다.

추행과 성희롱을 일삼던 자가 그 피해를 밝히려는 이들을 조폭을 동원해 협박까지 했다는 기사를 봤다. 악행에 악행을 더하고 악행을 악행으로 덮으려는 자는 우리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도에서 가장 엄중하게 다스려야 마땅하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도, 또 그 주변에서 악을 외면해 버리는 자들도 적지 않지만, 불의에 눈 감으려 하지 않는 고귀한 이들이 우리들 중에는 분명히 있다. 이 글이 한 가지 방안으로서 제시한 것은 완결된 답변이 아니다. 잠정적인 제안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들 가운데 있는 이 선한 사람들의 더 많은 고민과 더 많은 경험들이 하나하나 모인다면, 서두에 소개한 질문에 대한 최적의 답변도 머지않아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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