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의해 추진위원장·한국문화복지협의회장

느닷없이 이런 수치들을 인용하면 의사소통이 될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옮겨 보자.

농장일이 미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820년에 70%, 1890년에 43%였던 것에 비해 현재는 겨우 1.9%에 불과하다.

공장일의 경우 처음에는 50%, 1940년대에는 40%, 현재는 15%로 감소하고 있다.

관리직·전문직·기술직·서비스 및 사무직의 비율은 1850년대에 겨우 4%였다가 1900년 13%로, 현재는 미국경제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수치는 미국 경제예측전문가 해리 덴트(Harry Dent Jr.)의 최근 저서에 있는 것이지만 그의 주장이라기보다는 미국의 보편적 자료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현재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관리직·전문직·기술직·서비스 및 사무직의 일 대부분이 컴퓨터의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이관되고 있다는 것이 오늘의 노동의 문제이다. 컴퓨터는 동력기계가 물리적인 노동을 자동으로 처리하듯 한 조직내의 각 단계에서 실행되는 일상적이고 조직적인 두뇌 노동을 자동적으로 수행할 수가 있다. 그러면서 컴퓨터는 점심시간, 휴가, 의료보험, 퇴직금 등도 요구하지 않는다. 감정이 없으므로 감정적 부대낌으로 일어나는 인간관계의 어려움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누구도 어떤 경영에서도 이 우수하고 편리한 관리사무·기술사무·서비스사무를 컴퓨터에게 의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현재의 현실’에서 사람이 할 일은 더 복잡한 직관력과 인간관계의 기술을 요하는 복합업무일 수 밖에 없다. 예컨대 리더로, 경영자로, 컨설턴트로, 스승으로, 디자이너로, 서비스 전문기획자로 일해야 한다는 뜻인데 이 일자리는 곳곳의 기업이나 공장 또는 집단 거점에서 수백명씩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두서너 명이면 족하고, 진실로 성공 반열에 드는 전문가라면 그 자신 혼자로서도 충분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지금 컴퓨터와 경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컴퓨터는 인간능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 말은 일리가 있지만 다른 한 측면을 완전히 묵살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은 전문성만이 아니라 창의적인 탁월성을 가진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그동안 단순한 작업으로 먹고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노동의 문제이며 현실은 점점 더 이 흐름을 분명히 하고 있다.

2000년 11월 영국의 <파아낸셜 타임스>지는 사설에서 ‘앞으로 한국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구조조정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대규모 실업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상한 것은 우리 사회의 모든 언설은 아직도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정보사회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자라고 말하던가, 아니면 시스템개혁을 하지 말고 산업사회적으로 계속 살아가자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어중간하게 말을 아끼면서 실업자가 늘고 있는데 아직은 버틸만하다라는 분위기를 계속 조성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에도 50대가 발붙일 곳은 눈에 띄게 없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에게 일자리는 있는가. 집계조차 안돼 있지만 30세미만 젊은이들의 일자리 역시 급격히 줄고 있다. 유럽에서는 벌써 18~24세 사이의 실업자가 50%를 넘어섰다. 그래서 최고의 창의력이나 직관력이나 통찰력을 가지는 교육의 혁신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OX나 하고 앉아서는 컴퓨터와 일자리를 경쟁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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