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비디오 케이블 네트워크 회사인 MTV는 새로운 프로를 구상할 때마다 직원들을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간다.

1996년 새 게임쇼를 기획할 때에도 이들은 하루종일 사무실 밖에서 어린이들과 보드게임을 하면서 놀았다. 그 결과 <그림을 그려요(Figure It Out)>라는 대히트 상품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수시로 조사자들을 파견해 18세에서 24세까지의 기숙사 방, 벽장, 수집한 CD 등을 상세히 살피는 일도 한다. 이를 통해 MTV 시청자들의 취향이 무엇인가를 점검하는 것이다.

신발회사 컨버스(Converse)에서 탐색자로 불리는 디디 고든은 뉴욕의 패션·예술 중심가인 소호에서 하루 몇시간씩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는 일을 계속한다. 이런 작업으로 고든은 컨버스 원스타(Converse One Star)라는 굽을 잘라내고 두꺼운 창을 댄 사워 샌들을 만들어내게 했다.

미국 최고의 디자인&엔지니어링 회사인 IDEO에는 <기술상자(Technology Box)>라는 것을 비치하고 있다. 서랍이 여섯 개인 파일캐버닛으로 구성되는데 이 속에는 아티스트와 엔지니어들의 책상 밑에서 수시로 나오는 주인을 알 수 없는 잡다한 물건, 내버린 물건 또는 종업원들이 수집하다가 흥미를 잃은 물건들을 담아 둔다. 물체나 재료들에는 크게 여섯 가지 꼬리표를 붙여서 구분해 두는데 <열기술, 놀라운 재료, 새로운 장치들, 전자기술, 재미있는 제조 프로세스, 빛과 광학>이라고 표기된다.

그리고 이 기술상자를 관리하는 큐레이터도 있다. 이 큐레이터들의 신념은 <데이터를 회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효과적으로 경험을 회상하는 것을 도와주는 메커니즘이 사람의 뇌속에는 있다>라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아마도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말이 창의력, 상상력 그리고 포괄적으로는 아이디어 일 것이다. 기발하거나 유별난 것이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생산적으로 유용한 것이거나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는 이 변화된 창의력의 요구는 이 시점에서 새단계 산업의 원자재로 불릴만큼 막중해졌다. 그러나 창의력이 어떤 개인의 능력에서 나타난다는 것만으로 시의적 요구에 부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창의력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방출하게 하는 계기와 환경을 만들어내는 일이 우선 있어야 하고, 이 창의력을 인정하고 모험적 실행을 할 수 있게 하는 과정이 또한 있어야만 현실이 될 수 있다.

근대 성공을 계속하고 있는 기업들에는 바로 이 같은 프로세스의 조직과 투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MTV, 컨버스, 기술상자 등의 사례가 바로 그것일 터인데, 이것을 과거의 관점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방법, 상당한 낭비, 쓰잘데 없는 투자로 보일수도 있다.

여기에 바로 오늘의 키워드가 있다.

우리 사회도 지금 창의력이란 말은 제법 상승하는 편이다. 지식기반 산업이라는 표어도 거리에 낭자하고 서로들 이 분위기를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실질적인 창의력 성장프로세스는 아직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 정부예산이나 공공자금의 지출에서 소프트웨어 항목은 여전히 성립하기 어렵다. 그저 하드웨어에만 예산집행이 가능하다. 이런저런 기업도 긴축경영이라는 원칙에만 매달려 있지 사원들을 데리고 놀러 다니거나 길거리에서 하루종일 카메라 필름을 소비하게 하는 경비를 주는 곳은 없다(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나,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의력이라는 거대한 표어에서 우리는 지금 무엇부터 각성해야 하는가. 창의력이야말로 어디서 갑자기 떨어지는 행운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의력이야말로 허무해 보일만큼 투자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것도 돈만의 투자가 아니라 조직환경·의식과정·탁월한 혜안의 선택 모두를 필요로 한다.

<지역문화의해 추진위원장·한국문화복지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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