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회 본격적 논의

“무분별한 낙태와 생명경시 풍조를 없애기 위해선 낙태를 완전 금지해야 한다.” 이같은 종교계의 주장이 최근 힘을 얻고 있는 가운데 여성학계가 낙태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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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대들의 낙태 증가 등 사회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시점에서 여성학계는 지난 16일 춘계학술대회에서 현행 낙태관련법의 합리적인 개정 등 법·제도적 과제를 제기했다.

지난 16일 서울대에서 열린 한국여성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박숙자 국회여성특위 전문위원은 “일년에 150만 건의 낙태시술이 이뤄지고 있고 미혼여성과 10대 소녀들이 낙태로 인해 건강까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불법적인 낙태는 국민건강보험의 혜택도 받을 수 없을 뿐더러 낙태는 곧 생명경시 행위로 받아들여져 죄의식에 시달리는 여성이 많다”면서 법과 현실의 괴리가 오히려 여성들의 피해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여성의 건강과 인권을 해치지 않으면서 무분별한 낙태를 막을 수 있는 대안은 뭘까. 이에 박 위원은 현행 낙태관련법을 현실에 맞게 합리적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했다.

박 위원은 종교계에서 주장하듯이 낙태의 완전금지가 낙태율을 낮추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독일의 경우 강간이나 경제적 이유 등에 의한 낙태만 허용하던 1987년 낙태율이 23.2%였던 데 비해 임신 12주 이내면 언제라도 낙태가 가능하도록 법규정이 완화된 1996년 낙태율이 7.6%로 떨어진 것을 보면 낙태규제의 완화여부와 낙태율이 반드시 함께 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박 위원은 낙태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낙태죄에 관한 합리적인 입법화와 동시에 다양한 사회적 조치들이 취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국의 낙태규정>

 국가명   입법내용
프랑스  치료적 낙태의 경우 특별한 상담절차가 필요없고, 임신 12주 이내의 낙태는 포괄적인 의학적·사회적 상담절차를 거쳐야 한다. 낙태시술을 받기전 7일간의 유보기간을 두고 있으나 치료적 낙태는 유보기간이 필요없다.
독일  임신 12주 이내의 경우 낙태시술 3일전 상담한 증명서를 받으면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임신 12주 이후의 경우 임부의 생명의 위험 또는 육체적·정신적 건강상태의 중대한 위험이 있을 때 낙태시술을 허용하고 있다.
핀란드  임신 16주 이내에 한해 임부의 연령이 17세 이하나 40세 이상. 4명의 자녀를 출산했거나 의학적으로 긴급한 경우는 다른 절차없이 낙태를 할 수 있다. 다만 의학적, 사회적, 범죄학적 사유일 경우는 의사의 진단과 확인 과정을 거쳐 낙태할 수 있다.
이탈리아 임신 90일 이내에는 상담을 거쳐 낙태시술을 받을 수 있다. 그 이후에는 임부에게 육체적, 정신적 위험을 초래할 경우 의사의 확인을 거쳐 낙태할 수 있다.

현재 우리 나라는 1953년부터 형법(제27장)에서 낙태죄를 규정, 낙태를 금지해 왔으나 73년 유신체제하에서 국회를 해산한 채 비상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모자보건법(제14조)을 제정함으로써 우생학적,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강간·준강간에 의한 임신 등 일부의 낙태를 허용하게 됐다. 그런데 당시 정부가 모자보건법에서 낙태 허용범위를 규정한 것은 여성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가족계획사업을 촉진시키기 위해 산아제한의 수단으로 낙태를 합법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 형법에 의해 낙태죄로 처벌되는 건수는 극히 드물어 사문화된 법이나 마찬가지이고 모자보건법에서 허용하는 낙태 범위도 여성의 건강과 선택권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보완과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 위원이 현행 낙태관련법에서 고려해야 한다고 제기한 입법 과제는 다음과 같다.

▲12주내 임신 허용

독일, 스위스 등 많은 나라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12주부터 인정하고 그 이전에는 낙태를 완전 자유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도 이를 고려해 임신 12주 이내의 낙태와 12주 이후의 낙태를 나누어 규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12주 이내는 의무적으로 사전상담을 거친 후 사유에 상관없이 허용하도록 하고 12주 이후는 일정한 사유에 해당되는 경우만 낙태를 허용하는 방안이다.

▲사회·경제적 사유까지 확대

모자보건법에서 의학적, 유전학적, 윤리적 사유와 임신 28주라는 기한에 한해 낙태를 허용하고 있으나 허용 사유를 임부의 사회적, 경제적 사유로까지 확대하고 기한은 20주 내지 24주로 단축하는 방안이다.

헝가리는 임부가 혼인하지 않았거나 6개월 이상 별거하고 있는 경우, 임부와 그 배우자가 셋집 또는 자기 소유의 집이 없는 경우, 임부가 35세에 달한 경우, 임부의 배우자가 전투병력이나 경찰 등으로 6개월 이상 장기 복무하는 경우, 임부 혹은 배우자가 6개월 이상의 자유형을 받은 경우 등에는 낙태심사위원회의 재량으로 낙태 허가를 내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부녀자·배우자동의 전제 등 수정

모자보건법에서는 낙태를 허용할 때 배우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또 형법의 낙태죄는 임부를 부녀만으로 한정해 기술하고 있다. 이는 혼인을 전제로 한 임신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현재 미혼여성들의 낙태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용어는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낙태전 유보기간과 상담 필요

낙태율을 효율적으로 낮추기 위해선 금지규정의 강화보다는 적절한 절차 규정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많은 나라에서는 허용사유 확인 과정과 사회적 상담, 낙태시술 장소 및 시술의사, 시술한 의사의 보고 등의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법률적으로 허용된 낙태에 대해서는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홍보하여 제대로 된 의료처치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 낙태시술 전에 유보기간(보통 6∼7일)을 두고 반드시 상담과정을 거치도록 함으로써 낙태를 선택할 때 신중을 기하도록 한다.

▲출산 선택한 미혼모에 사회지원

미혼모, 특히 10대 미성년 소녀들의 낙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에 특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상담을 통해 낙태가 아닌 출산을 선택할 경우 현실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미혼모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지원체계도 마련돼야 한다.

이날 토론에서는 “규제 자체도 의무화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오정진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원은 “북경 여성대회에서 채택된 여성의 생식권에 대한 정의는 충분한 정보는 주되 규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며 법적인 규제에 대해 반대했다.

참석자들은 “지금까지 정부주도의 산아정책으로 인해 암암리에 낙태를 피임수단으로 권장하는 분위기였으나 저출산율 시대로 접어든 지금, 여성의 인권과는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낙태반대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그리고 이제는 여성의 관점에서 낙태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 어떤 해법을 내올 것인지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김 정희 기자 jhlee@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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