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성 변호사의 이러시면 안됩니다 - 4

왜 피해자들만 용기내야 할까

세상이 진정 바뀌려면

‘미투’만으로는 부족

우리의 통렬한 자기반성 필요

 

세상이 진정 바뀌려면 피해자들의 ‘미투’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들 모든 주변인들의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미투’를 넘어선 ‘아임쏘리’가 돼야 마땅하다. ⓒ여성신문
세상이 진정 바뀌려면 피해자들의 ‘미투’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들 모든 주변인들의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미투’를 넘어선 ‘아임쏘리’가 돼야 마땅하다. ⓒ여성신문

가해자 ㄱ이 있다. 그리고 ㄱ의 가해현장에서 ㄱ의 언행을 제지하지 않은 채로 생각 없이 함께 웃고 떠들던 주변인 ㄴ, ㄷ이 있다. 얼마 전 동아일보의 한 기사에서 소개된 사례를 보자. “건설업체에 갓 입사한 A씨는 4월 사내 체육대회를 앞두고 열린 회식 자리만 떠올리면 치가 떨린다. 남성 상사가 ‘A씨가 팬티만 입고 춤추면 응원상이 확실한데 생각 없어?’라고 말했고 남성 동료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A씨는 수치심에 혼자 밖으로 나가 눈물만 쏟았다.” 여기서 피해자 마음에 상처를 입힌 건 누구일까?

직접적인 성적 언동을 했던 가해자는 아니더라도, 그 부적절한 언행을 빤히 보면서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오히려 맞장구치듯 낄낄거리는 주변인들의 모습에서 피해자는 배신감과 분노감을 느낀다. 그 방관자가 평소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생각해 오던 동료였다면, 이처럼 무신경한 모습을 보일 때 피해자는 어쩌면 더 큰 충격과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위하는 척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훨씬 더 큰 미움이 생겨난다. 하물며 부당한 상황에서 내 편이 돼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분별없이 방관하며 맞장구치고 있을 때 그 배신감이야 오죽하랴.

피해자 가운데는 ‘그 자리에서 함께 웃고 거들며 방관하던 사람들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나요?’ 라고 질문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울 답변을 제공할 수가 없기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법적인 견지에서 본다면야 직접적 언동으로 1차 피해를 입힌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고 이를 제재하는 것 이외에,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서도 그 언동을 제지하지 않고 내버려두면서 같이 웃었다는 것만으로 방관자들에게 징계 등의 제재를 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에는 ‘부작위범’이라는 개념이 있다. ‘부작위’라는 말의 의미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를 처벌할 수 있는 경우를 뜻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을 처벌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딘가 어색하다. 그렇기 때문에 법에서 원칙적인 처벌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언가 적극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피해를 끼친 ‘작위범’이다. ‘부작위범’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그 사실을,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친 것과 동일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예외적인 때에 한해 처벌할 수 있다.

같은 논리에서 직접 행위자가 아닌 방관자를 제재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법적으로 책임을 논할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 법 이외의 다른 기준과 관점에 따라서도 아무 잘못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방관자를 제재하기 어렵다는 답변으로 인해 피해자 얼굴에 서려오는 실망의 그림자가 정녕 무엇 때문인지를 우리는 간과해서도 도외시해서도 안 된다. 피해자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는 것은 가해자의 언동만이 아니다. 주변 방관자들의 모습에서 비롯한 배신감과 분노감 또한 피해자에게 상처를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방관자들이 징계 대상은 아니더라도 이들에게 도덕적 비난가능성마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한 번쯤 이렇게 되새겨 보기를 권한다. 오늘 누군가가 어느 피해자에게 ‘팬티만 입고 춤추면 응원상이 확실한데 생각 없어?’ 라는 성희롱 발언을 할 때 그 자리에서 함께 낄낄거린 적이 있었다면, 자기 전에 단 1분만이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내가 오늘 하늘을 우러러 진실로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말과 행동을 하였는가?’ 돌이켜보길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한 점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겠다면? 좋다. 그냥 그렇게 살길 바란다. 언젠가 누군가가 다름 아닌 바로 당신에게 인격적 모멸감을 뼈저리도록 느끼게 할 만한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아무도 당신을 옆에서 돕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당신 옆에서 당신을 향해 낄낄거릴 것이다. 누굴 탓하랴. 그게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도덕률이라면 말이다.

전 세계적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의 ‘미투’ 해시태그 운동(#MeToo)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뜨거운 지지와 연대의 의사를 표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안타깝고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왜 또 다시 피해자들만 용기를 내야 하는가. 우리들 모두에게는, 주변의 방관자들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잘못도 없는가. 우리에게 침묵할, 반성하지 않아도 좋을 권리가 있는가. 고해성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노니,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필자조차도 모든 상황 매 순간에 있어서 용기를 내야 할 때 충분히 용기를 내어 왔었는가의 질문에 감히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다. 그러니, 세상이 진정 바뀌려면 피해자들의 ‘미투’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들 모든 주변인들의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미투’를 넘어선 ‘아임쏘리’가 돼야 마땅하다.

성희롱 언사와 행동을 목격했을 때, 그 자리의 분위기를 깨뜨리는 것에 주저하지 말자. ‘그게 지금 웃자고 하는 소리냐고,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지껄이고 있느냐’고 적극적으로 항의하자. 하지만 때로는 차마 이런 용기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라도 재빨리 거두어들이자. 피해자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짓은 이제 더는 그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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