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영 변호사 발자국 쫓아

결심한 변호사의 길

최연소 사시 합격 뒤

판사 마다하고

법률구조공단서 공익변론

부장판사 거쳐 변호사 개업

뒤에도 여성·아동 향한 관심

“소외된 곳 보듬어야죠”

여성변호사회, 청소년·노인

문제로 관심 영역 넓혀

내년 세계변호사대회

세션 준비에도 박차

 

한 중학생의 마음에 잡지 『샘터』에 실린 한 여성 변호사의 이야기가 꽂혔다. 최초 여성 변호사인 고 이태영 변호사가 소외된 여성들을 위해 상담소(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열고 법률적 도움을 주고 있다는 글이었다. 그날 이후 소녀는 법률가라는 꿈을 마음에 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법대생이 된 그는 인생의 멘토인 이태영 변호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1986년 그는 최연소로 사법시험에 합격해 어린 시절 꿈을 이뤘다. 소설에 나올 법한 이야기 속 주인공이 조현욱(52)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이다. 그는 소녀 시절 품은 꿈을 그대로 실현했다. 이태영 변호사의 발자국은 그의 30년 법률가 인생의 하나의 이정표였다. 조 회장은 “이태영 선생님을 뵙고서 이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회에 보탬 되고파” 공익 변론

80년대는 사시에 합격하면 동네 잔치를 벌이던 시기다. 서울대 법대 4학년 재학 중 최연소로 사시로 합격했으니 집안의 자랑이었을 테다. 주변에선 판사로 임관을 선택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조 회장이 향한 곳은 대한법률구조공단이었다. 법률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익 변론을 지원하는 곳이다. 그곳에서만 10년. 그가 소외 계층을 위해 공익 변론을 한 세월이다. 조 회장은 “왜 공익 변론을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누가 뭐래도 정말 보람있었던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2000년 그는 판사로 임관해 법률가로서 새로운 길을 걸었다. “법률가로서 소송의 이면을 보고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판결해야 하는 판사가 진실과 정의에 관해 치열하게 의문을 던지는 역할이다”라는 생각에서다. 인천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퇴직한 그는 2008년부터 변호사로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특히 대한변협 장애인법률지원 변호사, 여성가족부 성폭력 피해자 무료법률구조지원 변호사, 대한변협 일·가정양립위원회 위원장, 서울특별시 상가 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 위원, 법조 공익모임 ‘나우’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아동·청소년, 장애인 등의 사회적 소외 계층의 인권 신장인권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는 작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그동안의 경험들을 인권정책에 반영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최근 그는 한국여성변호사회 10대 회장으로 취임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적 지원 확대를 위해 앞장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동안 여성변호사회는 학대 아동, 다양한 폭력으로 피해 받는 여성들을 지원했습니다. 최근에는 영역을 더 넓혀 이주노동자, 노인, 위기청소년 등 다양한 소외계층의 권리보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업무 영역을 확대해 나가면서 심포지엄이나 포럼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입법 방향도 제시하겠습니다.”

최근에는 청소년 문제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여성변호사회는 지난해부터 안양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과 멘토링 결연을 맺고 한 달에 한 번 찾는다. 이곳은 흔히 말하는 일탈 청소년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조 회장은 “처음에는 아이들과 서먹했지만 여성변호사들이 만남을 더해가면서 검정고시와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아이들을 격려하고 일대일 멘토링도 이어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앞으로는 고령화 시대에 어려움을 겪는 노인 문제에도 관심을 쏟을 예정이다. 특히 올해는 2019년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변호사대회를 통해 다른 나라 여성변호사들과 교류하고, 여성문제에 관한 세션을 맡아 진지한 토론을 펼칠 준비도 할 계획이다.

 

고용 상 보이지 않는 차별

한국여성변호사회는 1991년 여성변호사들이 설립한 모임으로 처음에는 친목모임으로 출발했으나, 여성변호사 숫자가 늘어나면서 그동안 법조계에서 아동학대 근절과 예방, 사회적 약자 인권보호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수십명에 불과하던 여성변호사는 지금은 약 7000명으로 늘었다. 한국여성변호사회에 따르면 전체 개업변호사 중 여성변호사는 약 25%를 차지한다. 하지만 늘어난 숫자에 비해 여성변호사의 현실은 여전히 열악하다. 가장 큰 문제는 ‘취업’이다. 변호사 업계 현실이 어려워지면서 일자리 문제는 변호사 내부에서 큰 이슈다. 하지만 조 회장은 여성 변호사가 겪는 취업 현실은 남성 변호사에 비해 더 냉혹하다고 지적했다.

“변호사 업계 전체가 힘들지만 그 가운데서도 여성 변호사가 더 힘든 것이 현실이에요. 고용 상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합니다. 여전히 여성이 육아 부담을 더 많이 지는 현실과 여성이 육아휴직을 사용한다는 점이 변호사를 고용하는 오너가 여성 변호사를 채용하는 것을 남성 변호사 채용 때보다 손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대형 로펌에서는 업무가 과중해 일과 생활의 균형을 이루는 것도 힘이 들고요. 중소 로펌에선 여성 변호사가 꼼꼼하게 일을 잘해 채용을 하지만 육아를 해야 하는 시기엔 교묘한 방법으로 변호사 스스로 그만두게 만들기도 하고요. 사업자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해요. 여성 변호사를 채용하는 것이 비용이 아닌 투자라고요. 실제로 육아휴직을 다녀온 여성 변호사들이 더 일에 집중하고 열의를 보입니다.”

 

관점의 차이가 태도 바꿔

지금도 공익 변론에 나서고 후배들을 챙기는 조 회장의 ‘착한 오지랖’은 집안 내력인듯 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집은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해 참 가난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시면서 우리보다 더 가난한 고향 여성들을 집에 데려와 먹이고 입히며 공장에 취직할 때까지 뒷바라지했고, 홀로사는 노인들과 집 나온 아이들을 데려와 먹이고 입혔죠. 형편이 나아진 지금도 어머니는 비싸고 좋은 것에 욕심이 없으세요. 오히려 좋은 것은 남 주기 바쁘시니까요. 말릴 수도 없어요. 그게 어머니의 즐거움이신 것 같아요.”

늘 미소를 띈 조 회장의 얼굴을 보면 큰 어려움없이 탄탄대로만 걸었을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단번에 사시에 합격하고 남편도 판사로 임관해 두 자녀를 키운 그의 가정은 남부러울 것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워킹맘으로서 일과 생활의 균형을 잡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고난은 가면을 쓴 축복이다”라는 말을 되뇌였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그에게 해준 조언이라고 했다. 관점의 차이가 곧 태도를 바꾼다는 이야기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든 일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힘든 일을 넘어지는 걸림돌로 여기느냐 성장할 수 있는 디딤돌로 여기느냐는 큰 차이죠. 시련과 어려움을 거치면 그만큼 내공은 커지기 마련이니까요. 세상 일이 모두 내 뜻대로 될 수 있나요? 안풀리는 것이 당연하기에 화낼 필요도 없는 거죠. 전 일이 안풀릴 때는 ‘지금부터 시작이야’라고 생각해요. ‘제로 베이스’라고 여기면 이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거죠. 상황은 바꿀 수 없지만 상황을 보는 눈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 그것이 조 변호사가 늘 환한 미소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조현욱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

전북 순창 출신으로 1974년 부산으로 이사한 후 고교 졸업까지 부산에서 성장했다. 부산 동래여고 졸업 뒤 1986년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시험에 최연소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19기로 1990년~1999년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소외계층을 위한 공익 변론 활동을 했다. 2000년 판사로 임관해 대전지방법원 판사, 대구지방법원 판사, 대구고등법원 판사, 인천지방법원 판사, 전주지법 부장판사, 인천지법 부장판사를 지냈다. 2008년 변호사 개업 이후에도 대한변호사협회 장애인법률지원 변호사, 여성가족부 성폭력 피해자 무료법률구조지원 변호사, 서울시 상가 임대차분쟁조정위원, 법조 공익모임 ‘나우’ 이사 등을 지내며 아동·청소년, 장애인, 외국인 등 인권 신장과 관련 변론 활동에 힘써왔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 위원, 국민권익위원회 중앙행정심판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더조은 종합법률사무소에 몸담고 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