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들 잇따라 PD 갑질 폭로

“사람 갈아 만드는 방송 더 이상 안돼”

저임금에 그마저도 임금체불 겪고

방송작가 10명 중 9명은 여성

인격 무시, 성폭력 피해도 경험

 

방송작가유니온 준비모임과 전국언론노조가 2016년 발표한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 결과. ⓒ여성신문
방송작가유니온 준비모임과 전국언론노조가 2016년 발표한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 결과. ⓒ여성신문

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에 시달리는 방송작가들이 잇따라 방송사와 PD의 ‘갑질’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방송계에서 ‘을 중의 을’로 꼽히는 방송작가들이 해고 위험을 감수하며 목소리를 내는 것은 더 이상 불합리한 처우를 견디기 힘들다는 비명이자 후배들이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선배들의 사명감이기도 하다. 방송작가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성폭력 고발운동인 ‘미투’(Metoo·나도 겪었다) 운동에 빗대 방송작가들의 ‘미투’운동으로 불릴 만하다.

방송작가의 열악한 처우가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1월 24일 오전 ‘인니’라는 이름의 글쓴이가 KBS 구성작가협의회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이 외부에 알려지면서다. ‘내가 겪은 쓰레기 같은 방송국, 피디들을 고발합니다’라는 제목의 이 글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와 ‘뉴스타파-목격자들’에서 작가로서 겪은 경험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이 글은 27일 오후 현재 4만회 넘게 읽히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는 작가 아닌 커피 심부름꾼”

인니는 우선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일하던 당시 “월급은 160만 원, 6주 간격으로 팀이 돌아가는 시스템이었다”며 “그곳에서는 24시간 일을 했다. 첫 주만 10시쯤 출근해 7시쯤 퇴근하고, 2~5주에는 밤낮도 주말도 없이 일을 했다. 수당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스로를 “심부름꾼이었다”고 자조했다. “밥 심부름에 커피 심부름이 주 업무고, 기껏 커피를 사왔더니 다른 메뉴 먹고 싶다는 선배의 말에 도로 내려가 다른 것을 사오기도 했다”는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또 “밖에서는 정의로운 척, 적폐를 고발하겠다는 PD들이 내부 문제엔 입을 조개처럼 꾹 닫았다”며 “업무 강도에 대해 지적하자 ‘여기는 말 잘 듣는 작가를 원한다. 그렇게 똑똑하게 굴 거면 여기서 일 못해’라는 답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글쓴이는 ‘뉴스타파-목격자들’은 “면접 때도, 합격통보를 할 때도 페이를 알려주지 않았으며 담당PD는 ‘공중파처럼 120만원씩 못 준다’고 했다”며 “최저임금도 안 되는 임금으로 상근을 하며 프리뷰, 섭외 등 많은 일을 떠맡았다. 갑질을 고발하는 그들이 막내작가들에게 갑질을 하는 형국이 아닌가.”

이 글에 다른 방송작가들도 공감하며 현재 32개의 댓글이 달렸다. 특히 ‘진작가2’라는 필명의 글쓴이는 ‘#미투’를 언급하며 “상식 이하인 행동을 봐왔기에 인니님의 글에 매우 공감한다”고 썼다. 그러면서 △대화가 아닌 고압적인 언행 △업무 태만 △무분별한 욕설 추임새, 성희롱 △페이 깎기 등 PD의 갑질을 거론하며 “이번을 계기로 문제 있는 이들도 꼭 바뀌길 바란다”고 적었다.

필명 ‘오르골’도 “이 모든 일(부당한 일)을 겪으면서 가장 힘든 점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라며 “부모님에게도 처음에는 말했다가 너무 화를 내시고 작가일 하는데 반대를 하셔서 말을 못하고 친구들도 그냥 때려치우라고 한다. 그래서 같은 아픔 갖고 있는 작가들끼리만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일을 잘해도 작가는 제작비 10~20만원 때문에 그냥 버려지는, 앞이 보이지 않는 직업”이라고 했다.

실제로 수많은 방송작가들이 노동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방송작가유니온 준비모임과 전국언론노조가 2016년 발표한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를 보면 응답자 633명 가운데 94.6%(599명)가 여성이었다. 주당 평균 53.8시간 일하며 한 달에 170만원 급여를 받았다. 막내 작가 시급은 당시 3880원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46%가 급여 체불을 경험했다. 82.8%의 작가가 인격 무시를 당했으며 성희롱, 성추행 등 성폭력 피해를 입은 경험도 41.1%에 달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11월 방송작가 150여명이 모여 노동조합을 세웠다.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는 당시 가장 시급한 과제로 “모든 작가 분야에 표준 계약서를 도입”을 꼽았다. 방송작가는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다.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면서 원고료가 제작비에 포함돼 준비한 프로그램이 방송되지 않으면 임금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12월 28일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를 마련해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집필’을 하는 메인작가에게만 해당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출연자 섭외부터 자막 작성 등 집필 외에 업무를 담당하는 작가들은 해당 계약서로는 보호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 PD 갑질 논란이 확산되자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측은 뉴스1에 “작가 및 보조작가의 처우 문제를 포함해 프로그램 제작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개선하기 위해 전반적인 조사를 하고 있다"면서 "문제점이 발견되면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가겠다”고 전했다.

뉴스타파는 26일 공식 홈페이지에 “취재작가 임금 수준을 전수 조사한 결과, 7명이 고용 초기 일정 기간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아 최저임금 미지급분 전액을 지급했다”면서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한 상당수 취재작가들이 과거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급여를 받은 상황이 있다는 점에 책임을 통감한다”고 전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