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나사르의 유죄 판결을 이끈, 법정에 나와 증언한 피해 여성들. ⓒ유튜브 영상 캡처
래리 나사르의 유죄 판결을 이끈, 법정에 나와 증언한 피해 여성들. ⓒ유튜브 영상 캡처

여성들 폭로로 밝혀진 미 대표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의 성범죄

미국 뒤흔든 ‘스포츠 사상 최대의 성폭력 스캔들’

선고 공판 전 7일간 여성 156명 증언 이어져

나사르, 위계 악용 성폭력 가해사실 인정

선처 호소했지만 이중적 입장 드러나 야유받아

아킬리나 판사 “강인한 생존자들의 판결 맡아 영광…

나사르, 당신의 사망 영장에 서명한다”

미국 사회가 ‘스포츠 사상 최대의 성폭력 스캔들’로 발칵 뒤집혔다. 미 국가대표 체조팀과 미시간 주립대 체조팀의 주치의였던 정형외과 전문의 래리 나사르(54)가 20여 년간 여성 체조선수 150여 명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하고 성폭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피해자들 중엔 올림픽 여자 기계체조 4관왕인 시몬 바일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게이브리얼 더글라스, 매케일라 머로니, 알렉산드라 레이즈먼 등도 포함됐다. 미 법원은 지난 24일(현지시간) 선고 공판에서 나사르에게 최소 40년에서 최장 175년의 징역을 선고했다. 

 

추악한 성범죄자임이 드러나 중형을 받은 미 국가대표팀 체조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 ⓒMichigan State University
추악한 성범죄자임이 드러나 중형을 받은 미 국가대표팀 체조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 ⓒMichigan State University

나사르는 1986년부터 체조 국가대표 선수들을 치료했고 공식 국가대표팀 주치의가 됐다. 2012년 런던올림픽,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미국 여자 체조팀이 잇따라 좋은 성적을 내면서 그의 유명세도 높아졌다. 2014년 그가 교수로 몸담았던 미시간주립대 여학생들이 나사르를 성추행 혐의로 신고했다. 2015년 나사르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선수들의 증언이 미시간 지역 언론에 보도됐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별 파장은 없었다. 

2016년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레이첼 덴홀랜더가 “15세부터 18세까지 나사르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그를 고소하고, “미국체조협회는 이를 알고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엔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매케일라 머로니가 “13세 때 전지훈련 때부터 2016년 리우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나사르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폭로했다. 성폭력 말하기 운동인 ‘미투(#MeToo)’에 용기를 냈다고 했다. 머로니는 “이런 일은 할리우드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나는 올림픽에 참가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불필요하고 끔찍한 일들을 견뎌야 했다”고 밝혔다.

이어 알렉산드라 레이즈먼, 게이브리얼 더글러스 등도 증언에 나섰다. 총 120여명이 성폭행 등 7가지 죄목으로 나사르의 성범죄를 고소·고발했고, 나사르는 지난해 11월 구속 기소됐다. 그는 우월적 지위를 악용한 성폭력, 의료행위를 가장한 성폭행 등을 저질렀음을 인정했다. 그는 이미 아동 포르노 소지죄로 연방법원에서 징역 60년을 선고받은 상황이었다.

이 사건이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최장 175년형’ 중형 판결 때문만이 아니다. 여성들 156명이 선고 공판에 앞서 일주일간 직접 법정에 나와 나사르의 성추행·성폭행 의혹에 대해 증언했다. 가해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끔찍한 범죄와 고통에 대해 증언하고, 성폭력 근절을 촉구하는 피해자들의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충격과 감명을 동시에 줬다. 

“나는 당신 때문에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 이제는 안다. 나는 행복해야만 하고, 당신 같은 학대자들을 감옥에 처넣기 위해서 살아야만 한다.”(매들린 존슨, 1월 17일 미시간주 법정에서 증언 중) 

“나는 그저 내 인생이 걸린 스포츠를 4년간 더 계속할 수 있게 내 몸이 잘 버텨주기를 바라며 의사를 찾아간 18살배기였다. 학대와 무시는 10년간 이어졌다. 나는 피해자라는 말이 싫다. 나는 생존자다.” (알렉시스 무어, 같은 날 법정 증언 중)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악몽을 꾼다. (...) 보이지 않는 상처들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꿨지만, 지금 나는 변하고 있다. 당신은 앗아간 자신감과 자존감도 회복하는 중이다. 당신은 나의 중심을 무너뜨리지 못하며, 더는 내게 권력을 휘두를 수 없다.”(제니퍼 헤이즈, 같은 날 법정 증언 중)

“진료실에서 그 일이 있었던 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 당신은 치유자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당신 때문에 망가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제이드 캐퓨어고, 생존자다”(제이드 캐퓨어, 같은 날 법정 증언 중) 

“당신은 내 몸을 6년간이나 성적 만족을 위해 유린했다. 용서할 수 없다. (...) 나사르 당신도 이제 알겠지만 어린 소녀들은 영원히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강한 여성으로 자라나 당신의 세계를 파괴하러 돌아온다”(카일 스티븐스, 같은 날 법정 증언 중)

당초 미 법조계는 나사르가 최대 25년형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는데, 여성들의 용감한 말하기가 사실상 종신형에 가까운 형량을 끌어낸 셈이다. 이번 판결을 맡은 미 미시간주 랜싱법원의 로즈마리 아킬리나 판사는 증언이 끝날 때마다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웠다. 한 피해자에게는 “당신을 괴롭혔던 괴물은 사라질 것”이라며 “당신이 상처를 극복하려고 강해질수록 그는 힘을 잃고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선고 공판일에도 그는 피해자들의 증언에 감사하다며 “당신들은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며, 매우 강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CNN은 “아킬리나 판사는 판사이자 치료자다. 그는 피해자 모두에게 공감해주고 위로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했다.

나사르는 법정에서 “범행을 깊이 후회하고 있다. 평생 죄인의 마음으로 살겠다”고 했지만, 이에 앞서 뻔뻔하게 자신을 변호하고 피해자들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주장한 사실이 드러나 야유를 받았다. 아킬리나 판사는 나사르가 공판 전 법원에 보낸, 위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읽고는 “당신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모른다. 이 법정에서 피해자들의 말을 듣는 일이 당신에게 가혹할 수 있지만, 피해자들이 수천 시간 동안 당신의 손아귀에서 견뎌낸 시간만큼 가혹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편지를 내던졌다.

 

래리 나사르 성폭력 사건 판결을 맡은 미 미시간주 랜싱법원의 로즈마리 아킬리나 판사가 지난 24일 선고 공판에서 나사르가 쓴 편지를 내던지고 있다. ⓒ유튜브 영상 캡처
래리 나사르 성폭력 사건 판결을 맡은 미 미시간주 랜싱법원의 로즈마리 아킬리나 판사가 지난 24일 선고 공판에서 나사르가 쓴 편지를 내던지고 있다. ⓒ유튜브 영상 캡처

이어 “나는 헌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했고,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며 “생존자들의 얘기를 듣는 일도, 이 판결을 맡아 선고를 내리는 것도 나의 영광이며 특권이다. 나는 방금 당신의 사망 영장에 서명했다. 당신은 위험한 인물이며, 그것을 깨닫고 개과천선할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나사르가 최소 480개월에서 최장 2100개월의 징역을 선고받는 순간, 법정에선 눈물과 환호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