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은 힘이 다른 여성들 발전에 밑거름 되도록

1971년 가족계획어머니회 동두천 읍회장을 맡은 이후 지금까지 약 30여 년간 여성과 지역사회에 봉사를 아끼지 않았던 한국어린이육영회 동두천지회 김군자(65) 회장을 만났다.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6.25 당시 충주로 피난 온 남편을 만나 1965년 동두천에 정착하게 됐다. 그럭저럭 타향에서 적응해가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가족계획어머니회 동두천 읍회장을 맡을 것을 권유했다. 당시 김 회장은 마을 어머니들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한 탁아소를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자신은 없었지만 그의 작은 가능성을 보고 밀어주는 이웃들의 성원에 힘입어 김 회장은 한번 해보기로 했다.

가족계획 홍보하며 여성운동과 인연

당시 정부는 인구 증가율 3%를 1.5%로 낮추기 위한 인구증가 억제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가족계획이 적게 낳아 잘 기르자는 산아제한의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들을 무계획한 임신과 출산에서 해방시키고 남성들에게 적극적으로 피임을 권해 여성의 건강을 배려한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매우 힘든 일이었다고 김 회장은 회상한다. 당시만 해도 연세 많은 어르신들은 가족계획사업을 못마땅히 여기고 있어, 가정방문 활동을 하다 노인들과 마주치면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왕 시작했고 국가가 정책적으로 펼치는 사업인 만큼 중단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김 회장은 전보다 더욱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 결과 김 회장은 대한가족계획협회로부터 가족계획 홍보 강사로 위촉받기도 했다.

가족계획협회에서 나흘간 강사 교육을 이수한 후 김 회장은 각종 단체와 행사장을 두루 다니며 1977년 8월까지 271회의 강의를 했고, 1176명의 남성이 정관수술을 하게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가족계획어머니회가 동두천 일대를 무대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던 1977년. 국무총리령에 의해 4개의 여성단체가 새마을부녀회로 통합되었고 김 회장은 새마을부녀회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진 단체에서 활동하던 여성들이 갑자기 한 단체에서 활동하자니 어딘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졌습니다. 고민 끝에 회원들을 규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로 하고, 각 리별로 체육대회를 열었죠. 매일 만나 연습하다보면 자연스레 정도 두터워지고 일체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동두천여상 선생님께 자문을 구해 26개 리대항 프로그램도 꾸몄습니다. 대항 뿐 아니라 26개 리가 하나 되는 통합 마스게임도 준비했습니다. 각 리가 한 달간 연습하는 동안 임원진은 자금을 마련하느라 발이 부르틀 지경이었죠.”

행사에는 ‘동두천 읍내의 집들이 거의 다 비었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많은 지역주민이 참여했다. 김 회장은 약 3천명 정도가 참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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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군자 회장이 이끄는 한국어린이육영회 동두천 지회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불우이웃, 독거노인 등 소외계층과 더불어

“체육대회는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질서, 응원 모두 만점이었죠. 하지만 정확한 점수 계산에 치우쳐 시상하다 보니 두 개 리가 탈락했습니다. 시상식이 끝난 다음 섭섭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던지 한 마을의 총무가 달려나오더니 제 목을 껴안으면서 ‘이장님과 이민들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갑니까’하면서 울음을 터트리는데, 순간 정말로 난감했고 안타까웠습니다. 저 역시 이게 아니었는데 싶은 생각과 함께 그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둘이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체육대회가 끝난 다음날부터 김 회장은 임원들과 리마다 순회하면서 치하의 인사를 했다. 그후 새마을부녀회는 혼연일체가 되어 꽃길 가꾸기, 자연보호운동, 저축장려 등 부녀회원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솔선수범했다. 손수 만든 토속음식과 물건으로 바자회를 열어 여기서 남긴 이윤은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했다. 또 새마을부녀회는 지역 여성들을 위해 부녀예술제도 해마다 개최하는 한편 시설아동과 후원자를 연결하는 야시장을 운영했다.

1981년 5월에는 시범적으로 새마을유아원이 전국 시도에 세워졌다. 당시만 해도 유아원을 운영할만한 교육인력이 부족해 새마을부녀회장이 당연직으로 원장을 맡았다. 김 회장도 비록 유아교육 전공자는 아니었지만 다른 여성들의 일손을 덜어준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다.

김 회장은 지역사회 활동을 하는 데는 외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런 외조를 이끌어내는 데는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김 회장은 전한다. 실제로 김 회장은 평소 집안일을 소홀히 하지 않고 집을 비워야 할 일이 있으면 자정을 넘겨서라도 챙겨놓고 다녀 ‘내일 자는 여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봉사활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방향전환할 터

“1974년의 일인데 꼭 다녀와야 할 새마을교육이 있었습니다. 여러 날 비워야 해서 남편의 동의를 받아야 했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더군요. 생각다 못해 친정여동생을 불러 끼니를 부탁하고 다음날 새벽 단잠에 빠져 있는 남편을 흔들면서 ‘여보, 나 새마을 교육 다녀올게요’했더니 그이가 ‘응’이라고 답했죠. 비몽사몽간에 잠꼬대인지 헛소린지 모를 ‘응’ 이라는 한마디에 옳다구나 하고 도망치듯 집을 나섰습니다. 6일만에 돌아오니 남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죠. 옳은 일 했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작전상 후퇴로 남편의 기분을 맞춰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오랜 뒤까지 이어지는 남편의 질타를 보면서 여성이 사회활동 하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했죠.”

현재 김 회장은 한국어린이육영회 회장으로서 육영회 사업과 동시에 자발적 사업으로 매주 월요일 독거노인들에게 목욕봉사, 월 1회 2가구 방문생활봉사, 폐품을 재활용하여 불우이웃 돕기 사랑의 저금통을 제작해 배포하는 등 지속적으로 지역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앞으로는 고교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독거노인이나 외로운 노인들과 학생들을 맺어줘 효와 봉사, 인간관계 형성의 체험을 통한 인성교육을 펼 계획이다.

“1970년대 사회운동의 기치가 올바른 가치 정립이었는데, 이 과제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우리 시민들도 방관자로 각종 정치, 경제, 교육, 환경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은 책임도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르고 현명한 시민이 많을 때 불의는 곧 발붙일 곳을 잃게 되지요. 여러 NGO들이 문제를 찾아내고 창의력을 발휘해 더불어 문제를 풀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나이는 많지만 후배들이 건강한 시대정신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여력을 바칠 생각입니다.”

<동두천 이복형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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