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신비』 베티프리단

 

『여성의 신비』 베티프리단
『여성의 신비』 베티프리단

“일단 페미니스트가 되면 우리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더 이상 편하게 앉아서 드라마를 보기도 힘들다. 세상은 성차별과 여성혐오로 가득 차 있으며 여성들은 끊임없이 성적 대상이 되고 착취당하고 있다. 내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내가 이 세상에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요즘 종종 듣는 소리다.

필자에게 페미니즘을 안다는 것은 더 넓은 세상을 보는 것이었다. “착한 소녀는 천국에 가지만 못된 소녀는 어디든 갈 수 있어”라는 말은 나를 가두었던 자기감시의 고삐를 풀어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때론 조금 엉뚱하고, 더 괴팍스럽고, 제멋대로여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관종(관심받기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페미니즘은 나에게 내가 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해주었다.

그런데 요즘, 페미니즘 안에서 이상하게 자유가 속박돼 버린 느낌을 받는다. 뭔가 페미니즘이 정답을 가진 듯 보인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페미니즘은 정답을 유포하는 학문은 아니다. 정답이라고 알려진 세상의 규범과 규율에 도전하는 하나의 몸짓이었고 언어였다. 점점 더 확고한 정답을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주류의 정답들을 부숴 하잘것없는 흙으로 만들고, 그 토양 안에 자유로운 생각을 꽃피우는 것이었다. 추상적인가? 페미니즘의 주인은 없으며 우리 모두의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며 자유를 누리는 학문이 아닐까?

페미니즘 안에서 주류로서 이데올로기적 프레임을 형성했던 것으로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1963)는 주목해 볼 만한 것이다. 이 책은 제2세대 페미니즘 물결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프리단은 ‘2차 세계전쟁이 끝난 후, 왜 갑자기 여성들의 결혼 연령이 낮아지고, 대학에 가는 여성들이 줄어들까?’라고 질문했다. 그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Suffrage)들이 얼마나 여성의 교육권, 직업을 가질 권리, 그리고 참정권을 위해 노력했는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프리단은 전쟁에 지친 국가가 여성들에게 가정주부, 어머니로 정체성을 부여하며 그것이 진정한 여성의 행복이라는 신화를 만들었고, 여성 잡지, 교육계 등이 그것에 동조해 움직였다고 비판했다. 그는 모든 것을 갖춘 듯한 여성들이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고 주장했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여성들이여, 사회적 성취를 통해 인간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라.’

이 책이 등장한 이후에 동일노동 동일임금법이 만들어졌고, 전국여성연합(NOW, 1966)이 결성되어 프리단이 최초의 NOW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의 책은 모든 여성을 위한 정답 페미니즘처럼 대중으로 확산됐다. 300만권의 판매부수는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책을 비판한 것은 우파 남성들만이 아니었다. 벨 훅스는 프리단이 노동시장에 나와 거친 일을 하고 있는 흑인 여성, 이주민 여성, 빈곤한 여성들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이 책은 대학을 나온 중산층 백인 여성들의 상황을 분석한 책이었다. 그러나 마치 모든 여성을 위한 ‘만병통치 정답 페미니즘’처럼 받아들여진 것이다.

사람들은 습관처럼 정답을 원한다. 그러나 정답은 ‘오답’이 무엇인지를 전제한다. 이런 면에서 정답은 폭력적이기도 하다. ‘신이 죽었다’라고 니체가 선언할 때, 그가 말하는 신은 전 인류를 통해 가장 고귀한 자리를 차지했던 ‘진리’ ‘정답’ 이었다. 즉, ‘정답(fact)은 없다.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해석은 백 개의 다른 의견이 나와도 괜찮다.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다. 타자의 다른 의견에 너그럽다.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을 들으니,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있나? 되묻게 된다. 세상에는 인류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페미니즘이 있을 수 있다. 만약 페미니즘이 우리를 더 좁은 곳에 가두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정답은 없다. 우리를 더욱 자유롭게 하는 페미니즘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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