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첫 여성 이사장 이경자

『절반의 실패』 펴낸

페미니스트 작가

학연·지연 없이

45년간 작가의 길

작가회의, 변화 위한

‘전환점’에 서 있어

사회 변화와 회원들의

요구에 귀 기울여야

“여성의 가치를 잊지도 말고 

잃지도 말아야 한다”

 

이경자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은 “과거에는 작가회의 조직이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면, 이제 ‘어머니’ 같은 사람이 필요해졌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경자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은 “과거에는 작가회의 조직이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면, 이제 ‘어머니’ 같은 사람이 필요해졌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국내 최대 문인 단체인 한국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 이사장에 ‘페미니스트 작가’ 이경자(71)씨가 선출됐다. 작가회의와 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를 통틀어 첫 여성 이사장이다. ‘여성운동의 촛불혁명’이라고 불리는 ‘미투’(Metoo) 운동이 한참인 2018년, 문학계 ‘거장’들의 성폭력이 속속 폭로되고 있는 지금, 평생 페미니즘에 천착해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소설가가 문제를 일으킨 작가들이 소속된 문인 단체를 이끌게 됐다는 점은 그야말로 운명적이다. 어쩌면 그만큼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방증일테다. 이 이사장은 이번 선출에 대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연히 내가 거기 있었던 것”이라고 표현했다. “1988년 그 민주화 과정 속에서 『절반의 실패』라는 소설로 남성 문화와 남성 권력에 폭탄을 투하했던 여성이 이사장이 된거에요. 그렇지만 제가 잘나서 선택적으로 이사장을 맡은 것이 아니에요. 시대가 요구하는 흐름 속에서 제가 있었던 거죠.”

30년 전인 88년 12월 세상에 나온 『절반의 실패』는 출간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다. 당시엔 금기시되던 고부갈등과 이혼, 외도와 매춘, 폭력과 빈민여성 등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성 이슈 12개를 직설화법으로 파헤친 말 그대로 페미니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또 다른 페미니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겪었을 법한 일화를 다뤄 여성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킨 것처럼 『절반의 실패』 역시 그의 말대로 남성들에겐 ‘폭탄’이었고, 여성들에겐 ‘사이다’ 같은 존재로 환호를 받았다.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듬해엔 KBS 2TV에서 동명의 TV드라마로도 제작됐다.

이 이사장은 『절반의 실패』에 이어 남존여비를 근현대사의 격랑에 넣어 그린 장편소설 『사랑과 상처』, 여성성의 왜곡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 장편소설 『그 매듭은 누가 풀까』, 탈북자 여성을 통해 현대사의 질곡을 그린 장편소설 『세 번째 집』 등 여성주의 관점으로 다양한 여성 이슈를 소설로 풀어냈다.

‘가부장제에 스며들지 못하는 여자.’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4녀 1남 중 맏딸로 태어나, 아홉살 때 품은 작가의 꿈을 키우며 살던 그는 결혼 전에는 성차별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결혼은 그의 생각을 뒤바꿔 놓았다. 장남과 결혼해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면서 4년 간격으로 두 딸을 낳은 그는 가부장제의 문제에 눈뜨기 시작했다. 결혼을 가리켜 “모든 차별의 교과서”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 문제의식 하에 그동안 드러내지 못했던 여성 문제를 직접 여성들을 취재해 『절반의 실패』를 쓸 수 있었다. 이후 이혼을 하며 28년간의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나서는 “남편 눈치 보지 않고 머리 맡에 등을 켜놓고 책을 보다 그대로 잠들 수 있으니 나로 돌아오는 기분”이라고 당시의 심정을 표현했다. 

여성 운동의 대중화에 물꼬를 텄다는 평가가 쏟아졌지만 기존 문단에서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마치 이단아 취급을 받아야 했다. 작품 전면에 드러난 여성주의 관점이 남성들에겐 불편했을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한국 문단도 또 다른 가부장 사회였다. 이 이사장은 스스로를 “섬 같은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떤 권위도 부러워하지 않고, 어떤 권력도 무서워 하지 않고, 어떤 명망도 즐기지 않고,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 그게 나의 문학에 깔린 기본 색깔이에요. 바로 평등과 평화와 자유.”

학연,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73년 등단 이후 45년간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그이기에 작가회의 이사장직이 맡겨졌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 이사장은 취임하자마자 미투 운동으로 성폭력 논란이 일고 있는 시인 고은과 연출가 이윤택의 거취 문제를 결론 내야 한다. 두 사람 모두 작가회의 회원이다. 작가회의는 오는 3월 10일 이사회를 소집해, 고은과 이윤택의 징계안을 상정하고 처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고은 시인은 2월 22일 작가회의 상임고문직을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이사장 앞으로 작가회의 회원 탈퇴서를 제출했다. 이 이사장은 “범죄 사실이 확인된 이윤택 연출은 제명 처분을 받을 것”이라며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이사장은 “우리 사회가 변화의 국면에 와 있듯 작가회의도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작가회의 소속 회원들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지원해주는 조직으로 탈바꿈하겠다고 했다.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 우리 사회가 변화의 국면에 와 있듯, 작가회의도 권위, 억압, 권력의 관점에서 회원들을 바라보고 조직을 관리하는 사람은 필요 없어졌다고 봅니다. 과거엔 작가회의 조직이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면, 이제 ‘어머니’ 같은 사람이 필요해진 것이죠. 나의 생애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간섭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지원해주는 것으로 작가회의의 방향도 나아가야 합니다. 제 경험은 제가 살던 시대에서 옳은 것이었죠.”

 

이경자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경자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년간 무거운 책임을 맡으면서 그는 또 다른 고민도 안게 됐다. 집필 중인 소설의 출간의 일정이 그것이다. 『슬픔의 정원』(가제)라고 이름 붙인 이번 책 역시 여성 이슈를 이야기에 녹일 예정이다. 이 이사장은 “가부장제 안에서 살고 있는 남성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들이 그 사람들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여성들의 생명을 어떻게 억압하고 옥죄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며 “슬프고 무거운 이야기를 편안하고 재미있게 쓰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더 많은 남성들이 여성 이슈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할망페미”(할머니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며 예전보다 부드러워졌다고 말했지만 인터뷰 내내 그는 ‘페미니스트’ 면모를 숨김 없이 드러냈다. “과거에 삼강오륜, 삼종지도(여자는 아버지·남편·아들을 따라야 함) 등으로 여성이 지켜야 할 규범을 남성의 관점에서 정해놓은 경전이 존재했던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여성 문제는 여성의 삶 속에 다 담겨 있었어요. 나는 나에요. 나의 가치는 누구하고도 비교할 수도 없고 누구도 훼손할 수 없어요. 여성의 삶이 곧 경전이라는 거예요.”

그는 후배들에게도 주체적인 삶을 강조한다고 했다. “자기로 살아야지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이사장은 소설가는 “‘왜’라고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왜’는 저항, 반항, 분노라고도 말할 수 있다고도 했다. 왜 라는 질문은 그를 결국 페미니즘 소설 집필로 이끈 동력이 됐다.

“왜 라는 질문이 늘 저를 붙들었어요. ‘왜 여성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똑같이 돈 버는데 왜 여성은 남편 뒷바라지 해야 하지’ ‘나도 우리 부모님의 딸인데 왜 남편의 부모만을 섬겨야 하지’ 같은 질문들이죠. 그래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왜 하필이면 여성 문제를 소설로 쓰느냐는 질문을 하는데, 저는 그렇게 답해요. ‘나는 여자니까, 여자의 문제를 소설로 쓴다’고요. 여성은 인류의 절반이잖아요. 여성의 관점은 곧 인간주의적인 관점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러니 안쓰면 안되는 거죠. 배가 고픈 사람이 밥을 하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했던 거예요.”

그는 특히 자매애와 연대를 강조했다. 여전히 남성 중심인 한국 사회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여성들끼리 뭉쳐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 문화에서 배울 것이 있어요. 동지애. 그룹에서 재능이 없더라도 끌어주고 밀어줘요. 여성은 조직 내에서 권력도 경험도 부족하다보니 그게 힘들죠. 그래서 ‘우리’가 돼야 해요. 여성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존중, 자부심이 있어야 해요. 여성의 가치를 잊지도 말고 잃지도 말아야 해요.”

 

이경자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1948년 강원도 양양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7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확인』으로 등단

·소설로는 『절반의 실패』 『그 매듭은 누가 풀까』 『세 번째 집』 『성옥이네 집은 어디인가』집필.

산문집으로 『딸아, 너는 절반의 실패도 하지 마라』 등 있으며, 중국 모계 사회를 곁눈질한 문화 체험기 『이경자, 모계 사회를 찾다』가 있음.

·2011년 제6회 고정희 상, 2014년 제17회 한국 가톨릭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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