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중심 인간관계

성찰적으로 되돌아보고

변화하려는 남성 도와주는

사회적 노력 함께 한다면

더 빨리 미투의 끝 볼 것

 

 

‘미투’(Metoo·나도 말한다)의 끝은 어디일까? 이제 시작인데 끝을 이야기하다니 어불성설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현상으로서 미투의 끝에 대한 여러 생각을 정리해 봄으로써 현재의 미투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문제제기를 해본다. 우선 ‘미투의 끝’이 갖는 의미부터 생각해보자.

첫째, 미투 물결이 멈추는 순간이다. 과정으로서 순간을 어느 시점에 고정시키느냐 하는 문제는 있지만, 연일 미투 관련 보도가 지속되는 현재 상황이 이른바 ‘잠잠해지는’ 상황이 될 것이다. 둘째,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젠더폭력의 위협은 사라지기 시작했으나 또 다른 차별이 심화될 것이다. 벌써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펜스룰’(Pence Rule)이 대표적 현상이다. 셋째, 그냥 잠잠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응 조치의 강화 등으로 인해 여성이 젠더폭력에서 점차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미투를 잠재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다. 배우 조민기씨의 자살 이후 미투를 ‘기승전·혐(여성 혐오)’으로 이어나가려는 분위기이다. 어떤 죽음이든 그 앞에서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범죄 행위를 저지른 사람이 자살을 했다고 해서 그 범죄 행위 자체를 용서받을 수는 없다. 게다가 범죄 피해자에게 가해자 자살의 책임을 묻는 건 어떻게 해서든 혐오꺼리를 만들려는 광기의 표현일 뿐이다. 도둑질한 사람이 자살했다고 도둑질 당하고 신고한 사람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경우를 봤는가?

진보정치 집단을 교란하려는 정치공작으로 보는 해석은 그 은밀한 가부장적 남성연대의 냄새를 너무 진하게 풍긴다. 미투를 정치공세 수단으로만 활용하는 이른바 보수의 움직임은 아예 논의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저열하다 치자. 세상 이치가 모두 음모로 돌아간다는 믿음이 너무 확고하다 보니, 이제야 용기를 내어 피해사실을 털어놓는 여성 피해자 뒤에 무슨 조직이 숨어있는 환상까지 갖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진영논리의 틀을 드디어 벗어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성을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존재로 묘사하는 언행은 피해여성에 대한 전형적 2차 가해 행위다.

공작정치나 여혐으로의 묘사보다 더 어이없는 것은 제1야당 대표가 “여성과 악수도 잘 안한다”는 식으로 공적 영역에서 여성 배제가 시작됐다는 점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가르쳐준 ‘남성다움’의 기준으로 지금까지 여성을 대해왔던 수많은 남성들의 ‘혼란’을 이해할 수 있다. 필자도, 여러 번 밝혔듯이, 여성과의 관계에서 적극적이었던 언행이 상대에게 불편과 심지어 공포를 줄 수 있었던 ‘남성다움’이 아니었나 반성하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는 연애가 아니라 “남자로서 나를 먼저 이해해 줘”식으로 나갔던 순간들이 개인적으로도 분명히 있다. 그 순간 여자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나의 남자다웠음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개구리가 사는 연못에 무심코 던지는 돌이 나의 남성다움일 수 있다는 반성을 하고 남성다운 관계가 아니라 인간다운 관계를 맺기 위한 성찰적 노력을 시작한다면, 악수가 아니라 무엇을 함께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구체적 상황에 따라서 오해를 피하기 위한 남성의 불안과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은 은밀한 남성적 연대가 해결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배제적·차별적 태도만 고착시킬 뿐이다. 나의 여자친구, 부인, 딸, 어머니, 직장동료들에게 먼저 말 걸고 내가 어디에서부터 변화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들어보자.

단기적 대응조치 강화 효과와 더불어 이러한 남성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미투의 끝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남성 중심 인간관계를 성찰적으로 되돌아보고 변화하려는 남성을 도와주는 사회적 노력이 함께 한다면 더 빨리 미투의 끝을 볼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전제로 하지 않는 미투의 끝은 없다. 계속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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