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숙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이혜숙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권력은 베버의 정의처럼 “행위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실제로 권력은 드러난 쟁점이 결정되는 과정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겉으로 드러나지 못하도록, 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도 작용한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정하거나 다양한 문제들 사이에서 우선 순위를 정하는 과정에 권력은 작동한다. 쟁점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공적으로 제기되지 않거나 논쟁이 되지 않는 쟁점들은 그 쟁점들을 억압하는데 성공하는 권력의 수행을 말해주기도 한다.

 

오랫동안 성별 구조적 권력관계 속에서 여성 이슈는 비가시화됐고 다른 문제에 비해서 주변적이고 부차적으로 취급돼 왔다. 전희경의 책 『오빠는 필요없다』에 나와 있듯이 권위주의 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을 진행하는 과정 속에서 여성들이 겪었던 고통은 개인적인 문제로 무시되거나 아니면 대의를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사소한 문제로 취급돼 왔다. 살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성희롱·성폭력 피해를 겪지 않은 여성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는데도 그동안 여성들이 목소리를 충분히 낼 수 없었던 것은 성별 불평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해자한테 보복을 받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는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불평등한 권력 관계 속에서 피해를 말하고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최근 여성들의 성추행 피해 폭로 이후 미투(#Metoo) 운동이 문화예술계, 연예계, 체육계, 정치권, 대학가로 확산되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고발한 김지은씨, 그 후 많은 여성들이 용기를 내서 고통 속에서도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성희롱·성폭력 경험을 드러내고 가해자를 고발하고 있다.

여성이 피해 경험과 억압돼 있던 문제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하는 ‘파레시아’를 통해 개인적인 수준에 작동해 왔던 뿌리깊은 성별 불평등 구조에 저항하려는 시도다. ‘파레시아’는 ‘진실을 말하는 용기’, ‘위험을 감수하는 말하기’, ‘비판적 태도’를 뜻한다. 푸코의 책 『담론과 진실』에서 이와 같은 ‘파레시아’를 통해 실천철학의 새로운 장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불평등한 권력관계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말하기 실천을 통해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태도를 지키는 것이다.

미투운동을 통해 오랫동안 강요받았던 침묵을 깨고 용기 있는 고발을 한다는 것은 그동안 여성의 말하기를 억압해 왔던 권력의 작동방식에 균열이 생겼다는 신호탄이다. 이는 여성들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종속에서 벗어나 행동의 주체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며 여성의 세력화(empowerment)를 위한 출발점이다.

지난 15일에는 337개 단체가 모인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출범했다. “성차별, 성폭력을 근절하고 성평등 민주주의라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규범과 가치를 단단히 뿌리내리기 위해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억압됐던 여성들의 경험을 드러내면서 제도적 장치를 모색하고 여성의 역량을 조직적으로 결집시키는 지속적인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미투 운동의 확산은 궁극적으로 주요 정치적 결정과 집행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영향력의 정치와 참가의 정치로 나아가서 여성의 정치세력화와 정치의 ‘새판짜기’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돼야 한다. 남성중심적인 정치권의 유리 천장을 뚫고 그동안 억압되어 왔던 여성의 이해가 여성의 말하기를 통해 공적 의제화가 돼야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사회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말하기가 억압받지 않고 여성이 당당히 발언권을 획득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성평등 민주주의는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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