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저녁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성차별·성폭력 끝장문화제’ 참가자가 촛불을 들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3일 저녁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성차별·성폭력 끝장문화제’ 참가자가 촛불을 들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 주최

22~23일 1박 2일간 

미투 지지·연대 ‘2018분 이어말하기’

‘성차별·성폭력 끝장문화제’ 열려

2018분, 33시간38분. ‘미투(#MeToo)’ 운동에 동참하고 지지·연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시간이다. 섬처럼 흩어졌던 사람들이 광장에 나왔다. 우리의 용기와 연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말했다. 340여 개 여성·노동·시민단체와 개인 400여 명이 모여 출범한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마련한 행사다. 10대부터 70대까지, 이주민, 청소년, 노동자, 활동가, 조력자, 학생, 기혼, 비혼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193명이 차별과 폭력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여성신문은 이틀간 현장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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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2018분의 이어말하기’ 무대에 첫 발언자가 섰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2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2018분의 이어말하기’ 무대에 첫 발언자가 섰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3월22일 오전 9시22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의 타이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낮의 광장에서 타인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미투’를 외치기란 쉽지 않다. 발언대에 선 시민들은 그럼에도 다른 피해자들을 지지하고자, 가해자들을 규탄하고 경고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피해자이며 생존자다. 수없는 자살충동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죄책감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가해자들) 느껴야 하는 것이다.” 첫 발언자인 꽃마리(가명·41) 씨가 힘주어 말했다. 

대학생 A(24)씨도 입을 열었다. 초등학생 때 성추행을 당해 일기에 썼더니 어머니가 지우라고 했다. 그가 이 일을 말할 수 있게 된 건 “지난 3.8 세계여성의 날 열린 한국여성대회에서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일을 공개석상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서 용기”를 얻은 덕이다. “여자 친구들과 모이면 누구든 성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말을 한다. 우리에게 너무 일상인 일이다. 우리는 타인에 의해 그 기억을 지우고 살아야 했다. 더 이상 그러면 안 된다.” 

607:00 (22일 오후 7시30분경)

 

‘2018분의 이어말하기’ 시작 후 680분이 지났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018분의 이어말하기’ 시작 후 680분이 지났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해가 지고 추위가 엄습해도 여성들의 말하기는 계속됐다. 사람들은 주최 측이 준비한 핫팩을 하나씩 들고 발언대 앞에 앉았다. 퇴근하던 행인들도 잠시 멈춰 귀 기울였다. 

“강간이 아니니까,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니까 말해도 될까 자기검열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 한 20대 문화예술계 종사자는 자신을 성희롱하고 성추행한 동료들과 선후배들, 감독들을 겨냥해 말했다. “당신들의 시대는 끝났다. 우리는 말할 수 있고 앞으로도 계속 말할 거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여성, 장애인, 소수자,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경시하는 사법부를 지켜볼 것이다.”

“퇴근길에 이런 발언대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예쁜 옷 입고 화장 고치고 올까 생각했지만 어떤 모습이든 아름답지 않나.” 한 20대 여성은 가족이 저지른 성폭력을 털어놓고, 가해자에게 쓴 편지를 낭독했다. “아직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아 나는 너를 처벌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 모든 성폭력 피해자와 생존자와 연대하고 지지한다.”

연대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은 이들도 있다. 한 30대 남성은 “함께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며 “고은 시인에 이어 인기 연예인들, 종교계, 학계, 정치권까지 미투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문화가 성폭력과 성추행을 방치했다”라고 비판했다. “여성들은 미투운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멈춰서도 안된다. 미투 운동이 평등한 사회로 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 믿는다.”

자신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라고 소개한 여성은 “(성폭력이) 한 사람이 성욕을 이기지 못해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렇게 많은 ‘미투’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이렇게 대해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에 깔려 있어서, 누구나 자연스럽게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용감하게 성폭력을 고발한 이들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했다. “미투 운동으로 (피해 당시의) 고통이 되살아난다고 한다. 기억이 무의식의 상처와 감응해서, (피해생존자들은) 혼란스럽고, 화나고, 잠을 자지 못한다. 통쾌하지만 무력감도 느낀다. 모두 정상임을 알아주길 바란다.”

밤이 깊어지자 주최 측도 쉼 없이 움직였다. 현장 실무를 담당한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시민행동 소속 활동가들은 분주히 행사장을 오갔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이번 행사를 위해 1박2일간 사무실 문을 닫고 활동가 24명이 3개 조를 짜서 교대 근무에 나섰다. 피로와 추위를 이기고 밤을 새기 위해 연신 커피를 마시는 활동가들도 눈에 띄었다. 발언자들을 안내하고 시민들의 대자보 작성을 돕던 민우회 ‘새러’ 활동가는 “분주한 가운데에도 발언자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울컥하는 순간이 많다”고 했다.  

1340:00 (23일 오전 9시경)

 

22일 시작된 ‘2018분의 이어말하기’가 늦은 밤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2일 시작된 ‘2018분의 이어말하기’가 늦은 밤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직장 내 성희롱과 성차별 이야기도 쏟아졌다. 작가, 마사지사, 금융권, 마트, 톨게이트 종사자 등 다양한 일을 하는 여성들이 마이크를 잡았다. 가해자는 직장 상사, 후원자, 고객 등 다양했지만, ‘권력 관계’로는 피해자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 마사지 종사자는 “남성 고객들의 성희롱과 폭언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 고충을 호소해도 ‘남자들은 원래 음담패설을 자주 한다’ ‘네가 예뻐서 그렇다. 요령 있게 잘 대응해라’라는 대답뿐이었다”고 말했다. 

톨게이트에서 근무하는 한 여성은 “톨게이트 수납원들은 보통 여성이다. 차가 지나가는 30초의 순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난다. 손을 건네면 손바닥을 긁는 손님도 있었다. 어떤 날은 한 손님이 아랫도리를 다 벗고 있어 수치심을 느꼈다. 뭐하시는 거냐고 했더니 ‘왜, 보고싶냐?’더라. 알고 보니 주기적으로 그러는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도로교통공사 남성 관리자들이 회식자리에서 여성 수납원들을 한 명씩 옆에 앉혀 술을 먹이고 2차, 3차에 데려간다. 여직원이 술을 따르는데 남자 상사가 팔꿈치로 가슴을 툭툭 쳐서 항의한 적도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이유로 이후의 회사생활이 너무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한 50대 노동조합 간부는 30년 전 일을 고백했다. “1987년도에 금융회사에 입사했다. 신입사원인 나를 직장 상사가 끌어안곤 했다. 이런 스킨십이 비일비재했지만 상사였기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미투 운동 이후 직장 내 문화가 조금씩 바뀌는 듯하다. 한 직원이 회사에 성희롱 사실을 알렸더니 이례적으로 노조에서 나서서 처리 방법을 의뢰하더라. 그 사건은 빠르게 처리됐다”고 덧붙였다. 

2018:00 (23일 오후 7시 ‘성차별·성폭력 끝장문화제’)

 

 

23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성차별·성폭력 끝장문화제’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3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성차별·성폭력 끝장문화제’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날 오후 7시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성차별·성폭력 끝장문화제’가 열렸다. 주최측 추산 1000여 명이 모였다. 촛불과 손팻말을 든 시민들은 중간중간 사회자를 따라 구호를 외쳤다. 

‘미투시민행동’ 구성원들이 돌아가며 발언대에 섰다. 연극계 내 성폭력에 반대하는 연극인들의 연대체인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의 성지수 씨는 연극계에 만연한 성폭력과 여성혐오를 더 일찍 뿌리뽑기 위해 행동하지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했다. 그는 “몇몇 괴물을 처벌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존재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우리는 더 큰 사회 문제를 미투로 가리려는 어둠의 세력에 선동당한 게 아니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여기 서 있다. 미투를 외치는 우리의 목소리를 지우지 말라”라고 외쳤다. 

한상희 한국여성의전화 상담활동가는 “미투 이후 ‘가해자에게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려주고 싶다’며 당당한 목소리로 처벌 방법을 문의하는 이들이 늘었다”고 했다. 손영주 서울여성노동자회 회장도 최근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이 급증했다며 정부에 근절 노력을 촉구했다. 그는 “성희롱 상담 의뢰 여성 4명 중 1명은 40~50대 여성이다. 성희롱은 젊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연령에 걸쳐 발생하는 범죄다”라고 강조했다. 

성폭력 피해 지원을 받기 어려운 외국인 여성들의 처지를 호소하는 발언도 있었다. 레티 마이투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국장은 “한국 여성들 사이엔 미투가 퍼졌지만, 피해 지원 사각지대에 있는 이주여성들 사이에선 쉽지 않다. 신고할 통로가 없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친족성폭력 경우는 가족을 고발했다고 죄인 취급받기도 한다. 이혼까지 생각해야만 신고 가능하다”고 말했다. 

 

최영미 시인은 이날 ‘성차별·성폭력 끝장문화제’에서 시 ‘괴물’을 낭독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최영미 시인은 이날 ‘성차별·성폭력 끝장문화제’에서 시 ‘괴물’을 낭독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고은 시인의 성폭력 의혹을 처음 공론화한 최영미 시인도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작년 9월 쓴 시를 오늘 처음 대중 앞에서 읽는다”며 시 ‘괴물’을 낭독했다. “우리가 괴물을 잡았다. 시 한 편으로 괴물을 끌어내렸다. (...) 이것은 남녀 싸움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싸움, 과거와 미래의 싸움이다. 남성과 여성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날을 위해서 함께 전진하자. 우리는 그동안 너무 오래 참았다. 참고 숨기지 말고 얘기해야 한다. 나중에 돌아보면 역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청계광장을 출발해 경복궁-인사동-종각 일대를 한시간가량 행진했다. “강간문화 철폐하라 지금 당장”, “성평등 모르면 일단 외워라”, “여성 차별 기업에 내 지갑은 안 열린다”, “성폭력 미디어 안 본다”, “성폭력 정치인 안 뽑는다” 등 다양한 구호도 외쳤다. 인사동 일대를 행진할 때는 외국인 관광객을 포함해 시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이어 청계광장에선 여러 퍼포먼스와 뮤지션 슬릭, 정민아의 공연도 열렸다. 

 

‘성차별·성폭력 끝장문화제’ 참가자들이 청계광장을 출발해 광화문, 안국동 사거리를 거쳐, 인사동, 종각역, 다시 청계광장으로 1시간가량  행진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성차별·성폭력 끝장문화제’ 참가자들이 청계광장을 출발해 광화문, 안국동 사거리를 거쳐, 인사동, 종각역, 다시 청계광장으로 1시간가량 행진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3일 밤 청계광장에 모인 ‘성차별·성폭력 끝장문화제’ 참가자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3일 밤 청계광장에 모인 ‘성차별·성폭력 끝장문화제’ 참가자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얼지 않는 말들, 온라인으로 퍼져

용기의 불꽃이 되다

1박2일간 발언대에 선 생존자들은 종종 하던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관중의 박수와 함성이 그 자리를 메웠다. 발언자들은 검은 끈을 들고, 서로의 끈과 묶어서 길게 이었다. “발언자들의 목소리가 끈을 묶듯 연결돼 광장을 채우고 세상을 덮어 다른 세상을 만들자는 의미”에서다.

 

이날 광장을 메운 것은 여성들의 목소리만이 아니다. 행사장에 세워진 벽에는 여성들이 겪은 피해 경험, 가해자를 향한 일침, 피해생존자 지지 메시지 등을 담은 대자보 300개가 빼곡히 붙었다. ⓒ여성신문
이날 광장을 메운 것은 여성들의 목소리만이 아니다. 행사장에 세워진 벽에는 여성들이 겪은 피해 경험, 가해자를 향한 일침, 피해생존자 지지 메시지 등을 담은 대자보 300개가 빼곡히 붙었다. ⓒ여성신문

용감한 고백과 응원의 목소리는 온라인을 타고 멀리 퍼졌다. 여성들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해시태그 ‘#2018분의_이어말하기’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예뻐서 범죄에 노출되는 것이 아님을, 여자란 이유 하나만으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을 이번 이어말하기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으면 좋겠다.” “온라인 생중계 방송을 켜두고 잠들었다. 너무 좋다. 들으면서 느낀 건데 페미니즘은 내 정신건강에 너무나 이롭다.” “하나하나 너무 내 얘기 같아서 울고 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들 덕분에 외로움이 사라지고 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이날 끝장문화제에서 “우리는 어제의 불평등·성차별·성폭력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강해졌고, 이 연대의 힘으로 다른 세상을 만들어갈 것이다. 젠더폭력을 가능케 한 성차별적 사회를 전면적으로 바꿔나가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며 정부와 국회에 법제도의 개선을 촉구했다. 미투시민행동은 앞으로도 매주 문화제 개최 등 다양한 자리를 마련해 피해생존자들을 지지하고 사회 변화를 촉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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