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폭력 고발 이후 두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성폭력에 대한 고발 운동인 ‘미투(#MeToo)’ 운동이 문단을 비롯한 연극계와 영화계 등 예술계, 대학가와 정계 등으로 번지면서 각계의 피해자들이 봇물 터지듯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투 운동은 더 이상 침묵 속에 숨은 채 피해사실을 묻어두지 않겠다는 고발이자 성폭력이 그럴 수도 있는 것, 혹은 그래도 되는 것으로 용인되던 왜곡된 문화를 바꾸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현재의 미투 운동은 2016년의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통해 ‘리부트’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두 번째 흐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각 분야에서 높은 업적과 명망을 쌓은 유명인들을 대상으로 폭로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던 문단의 거장도, 문화게릴라로 불리며 시대를 풍미했던 연극계의 대가도, 여당의 대선 경선 후보였던 거물 정치인도 이 흐름을 비껴가지 못했다.

 

전방위적으로 미투 운동이 퍼져가는 가운데 지금 미투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은 차라리 건강한 분야라는 진단도 나온다. 여성단체들이 마련한 오프라인 집담회나 SNS 계정들을 플랫폼 삼아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말하기가 진행되고 있는 분위기에서, 아직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분야라면 피해자가 차마 입을 열 수 없는 공포가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학습이나 훈련, 연습과 실제 공연에서 신체 접촉이 불가피한 무용계가 성폭력 이슈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을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많다. 혹자는 도제식 학습을 통한 훈련방식에서 비롯된 스승과 제자의 수직적인 위계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하며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너무나 밀착돼 있기 때문에 피해가 발생해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구조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 진단이 말하는 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무용 스승과 제자 간 밀착된 관계 하에서 스승은 ‘가스라이팅(gaslighting·가해자가 상황을 조작해 피해자의 현실 인식과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일)’을 통해 제자가 절대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든다. 무용 지도 과정에서 발생한 성폭력을 가해자의 개인적인 버릇이나 지도방식으로 이해할 뿐 아예 성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피해자가 성적 불쾌감을 느꼈을 경우에도 상급학교 진학이나 콩쿠르 입상, 무용단 입단 등 진로에 대한 결정권을 쥔 스승이 ‘제자를 더 나은 길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니 용인해야 한다’며 피해사실이 은폐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더 무서운 것은 오랜 시간 가해자의 가스라이팅에 길들여져 피해를 피해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무감각이다. 이는 부모와 자식 간에 존재하는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문법과도 닮아 있다. “너 잘되라고 그랬다”며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와 이를 훈육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자식의 관계를 무용계 내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치환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피해자가 용기 내어 피해사실을 밝힌다 해도 제대로 된 후속 조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일단 무용계 내부엔 상담이나 신고를 전담하는 창구가 전무하다. 피해 제보를 적극적으로 은폐하기도 한다. 최근 한 협회에 내부자의 성폭력 제보가 들어왔으나 협회는 응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알력과 반목이 극심한 무용계 특성상, 성폭력 자체를 문제시하기보다 성폭력에 대한 고발이 어떤 의도로 행해졌는지, 배후에 적대적 관계의 세력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앞선다. 1997년 중앙대 무용과 교수의 남제자 성추행 사건이나 지난 2월 언론 보도된 창원대 무용과 교수의 성추행 의혹을 두고 ‘교수 간 파벌 싸움에 학생들이 이용됐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무용계 내 성폭력 문제를 논의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한국무용협회는 미투 운동에 대해 “단순히 성폭력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불평등과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라는 논평과 함께 “무용계 내외부에서 각종 피해를 봤을 무용인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은 물론 “미투유투(내 인권, 네 인권 모두 소중하다) 교육과 운동을 실천할 것”이라는 다짐을 내놓았다. 다수의 회원사를 거느린 한국무용협회의 실천을 지켜볼 일이다. 한편 무용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는 무용계 내 성폭력 실태를 탐사 보도할 계획이다. 총 18개 항목으로 구성된 설문조사를 통해 무용계에서 주로 일어나는 성폭력의 양태를 조사하고 피해자의 연령대와 피해 발생 장소, 가해자의 직업, 성폭력 발생 후 후속조치, 그리고 아직 수면 위로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동성 간 피해사실 등을 다층적으로 다룬다. 

미투 운동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길은 몇몇 유명인들을 처벌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가해자들의 반성을 이끌어내고 재발을 막는 것이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목소리들이 필요하다. 세상의 변화는 매우 더딘 듯하지만 한번 물꼬가 터진 변화는 쉽게 방향이 바뀌지 않는다. 말하는 여성들이 바꿀 세상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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