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에 대응하는

‘미숙한 진보’의 적반하장

 

석 달째 이어지는 ‘미투’(#Metoo) 국면에서 성폭력 가해 사실이 드러난 인사 중 유독 ‘진보’진영에 속한 이들이 많다. 이윤택 연극연출가는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1호’였고,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하면서 “저는 진보의 가치를 준수한다. 인간주의, 사람의 가치, 사회적 연대의 가치, 공동체의 가치, 평화의 가치, 민주주의 대원칙의 가치를 어느 순간에도 놓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정봉주 전 의원도 ‘진보’를 내세우긴 마찬가지다. 그의 트위터 계정 소개글은 “신나는 진보의 정치를 꿈꾸는 국민이 주인되는 미래권력들”이다.

일각에선 ‘진보진영에서만 미투가 집중된다’식의 음모론을 제기했다. 미투가 진보 진영을 와해하려는 ‘정치적 공작’에 이용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런 의미로 “왜 홍준표(자유한국당 대표)가 아니라 우리를 저격하느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 김어준씨다. 지난 2월 23일 김씨는 자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 “(미투를) 공작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어떻게 보이냐. 첫째, 섹스, 좋은 소재. 주목도 높다. 둘째, 진보적 가치. 그러면 피해자들을 준비시켜서 진보매체를 통해 등장시켜야겠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 진보적 지지자들을 분열시킬 기회다. 이렇게 돌아간다”고 ‘예언’했다. 김씨가 ‘예언’으로 만들어낸 프레임은 오히려 진보 진영 내에서 성평등 의제를 제기하기 어렵게 만드는 분열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문제는 심각하다. 하지만 김씨는 자신의 ‘예언’에 대한 비판에 대해 자신이 진행하는 tbs라디오 ‘뉴스공장’에서 “미투 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우려했을 뿐”이라면서 “진보진영 내의 젠더 갈등으로 프레임이 잡히면 미투 운동이 흔들리고 진보진영 내의 분열로 끝나게 된다”고 주장을 굳히지 않았다. 그의 말에 사과의 결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김씨와 함께 ‘나꼼수’ 멤버였던 정봉주 전 의원도 성추행 가해 의혹이 불거지자, 피해자에 대한 사과 대신 적반하장식의 해명을 택했다. 성추행은 물론 사건이 일어난 호텔 방문 사실 자체도 없다고 잡아뗐다. 이어 사건을 보도한 매체와 기자를 고소하고,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자 정 전 의원의 지지자들은 프레시안과 피해자를 향해 비판을 쏟아냈다. 익명으로 폭로했다는 이유로 폭로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댓글도 많았다. 김씨는 자신이 진행하는 SBS ‘블랙하우스’에서 정 전 의원 측이 내놓은 증거 사진만을 공개하며, 정 전 의원의 주장을 옹호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진보’라 불리는 이들은 미투에 대해 공통적으로 ‘적반하장’ 식의 반응을 보인다. 안희정 전 지사는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고 생각했다”면서 성폭력 가해 의혹에 ‘연애감정’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려 했고, 정봉주 전 의원은 의혹을 전면 부인하는 동시에 오히려 피해자를 공격했으며, 김어준씨는 ‘음모설’을 내세웠다. 앞서 탁현민 청와대 선임행정관도 자신의 피해 경험을 들춰내 ‘미투’를 외친 한 여성의 기고문에 대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기고글을 실은 여성신문을 고소했다. 자신의 언행에 대해 성찰이나 반성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은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서울NPO지원센터에서 아름다운재단 지원으로 ‘그 따위 정치는 끝났다’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미투를 통해 ‘그 따위 정치’, 즉 남성이 독점한 정치구조의 폐혜를 드러내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오혜진 문화연구자는 진보 진영이 그동안 성평등 의제를 다뤄온 태도, 그로부터 비롯된 몰성화된 진보 개념이 근원적인 문제라고 비판한다. 그는 “‘성폭력에 좌우 없다’는 명제가 자신들이 그토록 비판하던 수구세력의 수준으로 ‘진보’ 진영의 정치적·도덕적 수준을 격하시키는 것임에도 모멸감을 느끼기는커녕, 이를 ‘진보’만 나쁜 것은 아니라는 식의 자기합리화와 안도의 기제로 사용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진보진영 내의 일군의 세력이 ‘진보’라는 이름을 오염시켰으며, 따라서 미투’는 성정치의 관점에서 ‘진보’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기획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투 운동은 더 이상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구조와 사회에 종속돼 살 수 없다는 여성들의 외침이다. 특히 진보 진영 내 여성들의 문제제기는 정의·평등·인권을 부르짖던 그들의 ‘진보’ 개념에 성평등 의제는 빠져 있었다는 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들만의 ‘미숙한 진보’는 두고 볼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자신의 그동안 성차별과 성폭력에 홀로 대응하거나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이 체득한 진보의 가치를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미투에 나선 이들은 피해를 드러냄으로서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음에도 공동체를 위해 나서는 진보의 가치를 몸소 보여준다. 낡은 구조와 문화를 바꿔야만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여성들의 요구를 음모론이나 공작으로 치부하거나 이용하려 하지 말라. 젠더 관점 없는 진보는 끝났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진보진영이 어떻게 수용하고 혁신의 계기로 삼는지가 진보의 분열을 막는 가장 좋은 해법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