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서 22년 동안 일하고 임원이 된 필자가 직장생활을 잘하기 위해 고민하는 여성 직장인들에게 선배로서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주>

 

 

[나도 승진하고 싶어요] ③

 

1995년 S그룹에서는 “신경영”이라는 것을 전 그룹적으로 추진했고, 그 중 중요한 활동 중 하나가 고객 만족이었습니다. 고객 만족이란, 정의하기에 따라서 또한 실행하기에 따라서 많이 다른 활동이긴 하지만, 당시 S그룹은, ‘고객에게 만족스러운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면, 고객이 재구매를 하거나 긍정적인 입소문을 낸다.’ 반대로, ‘고객에게 불만족스러운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대로 두면, 그 고객은 우리의 제품과 서비스를 재구매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부정적인 소문을 퍼뜨리는데, 그 영향이 매우 크다’라는 이론에 근거했습니다.

특히 고객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만족과 불만족이 순식간에 판단되는 “고객 접점 서비스”의 관리가 매우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S그룹의 서비스 혁신에는, 놀이동산이나 금융회사 창구는 물론, 종합병원도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지금도 개선이 필요하긴 하지만 당시 병원의 서비스란, 갑질 그 자체였습니다. 더 좋은 서비스를 받기 위해 의사와 간호사에게 제공하는 촌지는 물론이고, 불친절하고 짜증스러운 태도,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는 경우가 허다했지요. 왜냐하면, 병원은, ‘환자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곳이라, 괜히 따지고 들었다가 환자 입장에서 더 나쁜 서비스를 받을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S그룹에서는 종합병원에도 ‘고객만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환자 및 보호자를 대상으로 고객 접점 만족도 조사를 정기적으로 실행했습니다. 진료 서비스뿐 아니라, 예약 및 수납 등의 행정 서비스, 장례식장까지도 매우 세밀하게 조사했습니다. 특히 조사의 초점은, 단지 “친절하게 웃으면서 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객 경험 프로세스”가 고객의 입장에서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해하기 쉬우며 효율적인가에 더 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종합병원에 갈 때, 예약과 검사, 진료, 수납 등을 찾아다니면서 번거롭거나 혼란스러운 경험이 다들 많이 있을 겁니다.

S그룹의 핵심 병원은 처음 개원 때부터, 직원들의 처우를 좋게 해서 촌지를 없앴고 고객친절 서비스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따라서 의사, 간호사, 직원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러나 접점 고객만족도 조사를 똑같이 적용됐습니다. 당시 저는 상반기 접점 고객만족도 결과 보고서를 완성하고, 늘 그랬듯이 윗분들께 보고를 드리고, 퇴근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충청도에 있는 리조트에 여름휴가를 가기로 했지요. 여름 휴가를 떠나기로 한 날 아침, 집에 전화가 왔습니다. “아, 조 박사!! 휴가 아직 안 갔네. 병원 조사결과를 오늘 오전에 병원에 가서 의사, 간호사들께 설명해줄 수 있을까?” 저는 순간 고민을 했지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조사한 결과를 다른 사람이 가서 설명하다가 왜곡되면 제가 수고한 것이 헛수고가 될 수 있고, 제가 가서 설명을 잘 하면 저한테 신용(credit)이 돌아올 거라는 욕심도 한쪽에 있었습니다. 또한, 상사가 휴가일정이라는 제 상황을 다 알면서 전화를 한 것을 보니,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때 제가 개인 일정을 희생하고 회사업무를 해 드리면 저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상사가 전화까지 해서 요청하는데, 매정하게 뿌리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저는 군소리 없이 휴가 일정을 오후로 미루고, 설명회에 참석했고, 어려운 질문과 항의를 잘 넘겨서 설명회를 마쳤습니다. 물론 비행기 타고 해외 나가는 일정이 아니었으니 가능했겠지요. 덕분에 S그룹의 병원은 또 한 번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나쁘게 생각하면 상사의 ‘갑질’일 수 있지만, 좋게 생각하면 “제게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 것이고, 저는 개인 일정보다 회사의 일정을 더 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마치고 휴가를 갔으니,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에서 실상 문제 될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정해지지 않은 일정에 얼마나 유연하게 대응하는가? 였습니다.

워라밸을 취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는 요즘, 특히 조직보다는 개인을 우선으로 한다, 이기적이다는 편견을 받기 쉬운 여자 후배들에게 “때로는 상사가 너무 고마워서 우리에게 미안하게 만들어 보세요.”라고 권합니다. 작은 투자로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것은 바로 상사가 나를 믿고 나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은정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소비자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은정 박사는 1995년 삼성그룹 소비자문화원에 입사해 22년간 삼성전자 글로벌마케팅 연구소장, 프린팅사업부 마케팅그룹장 등 삼성전자의 마케팅 및 역량향상 업무를 진행했다. 여성신문에서 재능기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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