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서 22년 동안 일하고 임원이 된 필자가 직장생활을 잘하기 위해 고민하는 여성 직장인들에게 선배로서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주>

[나도 승진하고 싶어요] ④

변화는, 내가 마음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어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불합리한 것을 깨달았으면 뒤에서 회사를 비난하거나 피하지 말고, 그들에게 제안해 보길 권합니다.

 

1995년 입사해서 아침 7시 출근, 오후 4시 공식 퇴근이라는 회사생활에 적응해 가던 중, 저는 고개가 갸우뚱할 일을 발견했습니다.

새벽 출근이다 보니 직원들이 다들 저녁 늦게까지 회식하는 것을 원치는 않았지만, 그 당시에는 회식이 매우 활성화돼 있던 때였습니다. 다음 날 출근이 힘들고 심지어 지각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1차, 2차, 심지어 3차까지 회식이 이어졌습니다. 그땐 왜 그랬나 모르겠지만, 낮에 받은 스트레스를 술과 노래와 대화로 풀고 함께 떠드는 것이 직장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소비자문화원은 여성 직원이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서무 경리 업무 담당자들이 다수였고, 임원 비서들이 있었고, 대졸 이상의 여성 직원은 저를 포함해 총 세 명이었습니다. 대졸 이상의 여성 직원은 가정이 있고 자녀가 있으니 회식에 참석을 잘 하지 않았고, 해도 1차만 마치고 귀가했습니다. 서무 경리 업무를 담당하던 동료들도 나이나 직급 등의 차이 때문인지 2차, 3차까지의 회식 자리를 그리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떠했느냐고요? 저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업무는 물론 다른 생활에서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오기를 부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몸이 힘들면서도, 집에 가는 버스가 끊기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회식을 따라 다녔습니다.

회사 생활을 어느 정도 한 뒤에, 저는 문득 이상한 것을 알아챘습니다. 회사에서 허용되는 회식비는 직원 숫자에 맞춰 책정됩니다. 매월 1인당 5만원으로 책정되고 직원이 10명이면 50만원이 우리 부서 회식비인 겁니다. 그런데 10명 중에서 여성 직원의 숫자가 많고, 게다가 그 여성 직원들이 저녁에 술 마시는 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빠지면, 나머지 직원들이 50만원을 다 쓰는 겁니다. 어찌 보면 여성 직원들은, 그 부서의 회식비 총액은 늘려 주고, 실제 사용은 하지 않는 고마운 존재였던 거지요.

그런 생각이 든 어느 날, 돈 관리를 하는 지원팀장에게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습니다. “여직원들은 저녁 회식에 잘 참석을 못하니, 회식비는 남자들이 다 쓰는데 불공평하다고 생각됩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라도 여직원들이 회식비를 균등하게 쓸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래봤자 점심시간을 이용하는 거니, 얼마 되지 않을 겁니다.”

그 지원팀장은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당시는 여자와 남자 직원의 임금격차, 승진격차가 엄연히 존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심지어 여성 직원들은 유니폼을 입던 시절이었습니다. 대졸 신입사원으로 여성 직원이 채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경영자인 회장께서 별도로 여성을 채용하라는 지시를 하셨고, ‘대졸 여사원 공채’라는 채용 대책이 별도로 생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성 직원들을 위해 별도의 회식비를 책정해 달라니….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예스(Yes)” 였습니다. 다만, 전체 회식비에서 여성 직원의 점심 회식비를 빼서 책정한 것이 아니라 별도의 여성 직원 모임회비를 지원해 주기로 했습니다. 만약 기존 회식비에서 빼왔더라면, 제가 남성 직원들로부터 엄청나게 욕을 먹었겠지요.

첫 여성 직원 모임은, 회사 주변의 근사한 일식집에서 정식 메뉴로 했습니다. 다들 뿌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여성 직원 점심 회식을 지원해 준 지원팀장도 첫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서무 경리 업무를 담당하던 여성 직원들이 모처럼 무서운 남성 상사 없이 회사 돈으로 즐겁게 수다를 떨며 점심을 함께했습니다. 물론 점심시간을 활용하는 것이라서 서둘러 먹고 사무실로 복귀하는 조바심은 있었습니다.

다른 여성 직원들도, 회식비 책정방식과 그 집행방식에서 무엇인가 여성 직원을 고려하지 않고, 여성은 거수기로 활용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고 합니다. 다만 아무도 그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고요. 반면 지원팀장이나 남성 직원들은 회식비 책정과 집행을 늘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그것이 여성 직원에게 차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여성 직원들의 회식비를 활용해서 술 마시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변화는, 내가 마음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어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불합리한 것을 깨달았으면 뒤에서 회사를 비난하거나 피하지 말고, 그들에게 제안해 보길 권합니다. 우리의 제안이 타당한 것이라면, 누구도 그것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그들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조은정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소비자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은정 박사는 1995년 삼성그룹 소비자문화원에 입사해 22년간 삼성전자 글로벌마케팅 연구소장, 프린팅사업부 마케팅그룹장 등 삼성전자의 마케팅 및 역량향상 업무를 진행했다. 여성신문에서 재능기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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