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태희 연극평론가가 지난 19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연 미투운동 연속 토론회 3차에서 발표한 토론문을 본인의 동의를 거쳐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연극·뮤지컬 관객들이 25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극뮤지컬관객 #With_You 집회를 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연극·뮤지컬 관객들이 25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극뮤지컬관객 #With_You 집회를 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윤택이 구속됐고 유덕형이 서울예술대학 총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두 사람은 그 배경은 조금 다르지만 아주 오랜 시간 우리 연극계에서 주요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각종 지원금과 상을 휩쓸고 예술대학을 배경으로 인력을 동원하는 이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들이 심판을 받고 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돌이켜보면 집단 창작이라는 이유로 우리 연극계는 가부장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집단의 의사소통이 이상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내 이야기를 효과적인 언어로 전달할 줄 알아야 한다. 존중, 배려, 협력, 이해, 포용 등의 미덕이 필요한 셈인데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모두 동의하겠지만 우리의 지난 역사가, 일반적인 사회의 분위기가 이런 시간과 노력을 개인에게 허락해주질 않았다. 연출가 중심의 미학은 비뚤어진 가부장이 더욱 활개를 치게 만들었고 그 시스템 안에서 다수의 개인은 소거됐으며 강자가 약자를, 혹은 약자가 또 다른 약자를 핍박하고 수탈하는 구조가 되풀이됐다.

폭력은 어떻게 재생산되는가. 그것은 두 가지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피해자를 침묵시킴으로써 또 하나는 수탈의 구조를 공고히 정착시킴으로써 이뤄진다. 물론 이 두 가지는 교묘하게 공조하고 있다. 피해자의 침묵은 결국 말할 수 없는 시스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내가 연극계 여성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최초의 계기 역시 작품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됐다. 왜 무대 위 여성들은 하나같이 소비되는 인물들에 불과한가. 왜 여성 인물의 납치, 감금, 강간이 비애에 찬, 복수심에 타오르는, 시련에 맞닥뜨린 남성인물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돼야만 하는가. 누군가는 위에 나열된 작품들이 나이 많은 남성 연극인들이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젊은 20, 30대 연극인들조차도 저런 연극을 기획하고 쓰고 만든다. 물론 창작자 개인의 젠더의식과 작품의 형상화 방식을 두고 어느 것이 먼저인지 따지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다만 남성중심적이고 폭력적으로 여성 인물을 다루는 작품들이 지원금을 받아 무대 위에서 공연됐고 찬사를 받았다는 점, 후배 연극인들이 선배 연극인들의 작품을 보면서 연극을 배워 나간다는 점은 문제적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무대 위 선배들의 작품을 따라 만들기 시작하면서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습득하고 이것은 무대 밖으로 확장되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또 다른 승계자를 만들어 권력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더 문제적인 것은 학교다. 선후배 간의 위계는 고스란히 교수와 제자에게, 졸업 후 현장으로 학내 정치로 이어진다. 한국의 예술대학과 예술고등학교, 현장은 기형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각 예술대학 혹은 대학의 연극영화과는 하나의 파벌로 존재하고 현장에서 권력을 과시한다. 얼마 전 연극계 내에서 문제가 됐던 ‘연극계 갑질논란’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강력한 위계서열과 그것의 재생산 속에서 약자들은 각종 수탈의 대상이 됐고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성폭력이다.

우리 연극계에서 주요한 책임을 맡는 연출, 무대 감독은 남성이 다수고 그 업무를 보조하는 조연출, 드라마터그는 여성이 다수다. 이 지점에서 제도의 개선으로 해결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각자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조연출과 드라마터그의 일은 구성원들을 다독이고 포용력을 발휘하는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엄연히 자신들의 전문적인 업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의 역할을 요청받는다. 대개 이런 역할은 전문성이 발휘되는 일이 아니라 언제든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미투 운동이 벌어지면서 많은 비난의 화살이 평론가들에게 쏟아졌다. 지원금의 분배를 결정하고 예술상을 심사하는 일들이 평론가들에게 주어졌으며 예술가의 미학을 찬미하는 글들을 그들이 썼기 때문이다. 물론 지원금의 분배와 예술상의 심사가 (평론가 단체에서 예술상을 주는 경우를 제외하고) 온전히 백프로 평론가들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는다. 최근에는 비율을 정해서 여러 창작 분야의 창작자들과 평론가가 골고루 분배·배치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온갖 비판이 평론가들에게 쏟아지는 이유는 그 동안 평론가들이 그들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창작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문제다.

얼마 전 연극계 갑질 논란과 관련된 토론회에서 한 참여자가 다음과 같은 맥락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외국 스탭과 작업을 하는데, 그 스탭이 하고 있는 일(정확한 기억이 아닐 수도 있지만, 대체로 한국 연극계에서는 소소한 일이라고 판단되는 종류의 일이었다.)에 연출가인 본인이 개입을 했다가 외국 스탭이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고 그 이후로는 그 스탭의 일을 침해하지 않도록 주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연극계는 각자가 맡은 일을 존중하지 않을 뿐더러 그 침해에 대해 항의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제작비가 적은 환경에서 종종 배우들이 스탭들의 일과 기획자의 일까지 담당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그들은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배우들보다 스탭들이 더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공동작업일지라도 그 안에서 나의 역할을 존중받고 이를 지켜내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계약서, 성폭력예방교육과 같은 제도가 ‘보조’해줄 수는 있는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작자 개인의 의식이 변화돼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공고한 권력을 무너뜨리는 일은 늘 약자의 몫이다. 약자의 연대가 제도를 바꿀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곧 새로운 강자를 만들거나 혹은 강자들이 그것을 제멋대로 전유해버린다. 따라서 제도의 개선과 함께 개개인에게서 여기저기에서 시시각각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개인의 변화는 대의명분이 아니라 자신과 가장 밀접한, 피부에 와 닿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내가 설 수 있는 무대가 없다는 것, 나의 일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 내 작업이 연출가에게 종속된다는 것에 화를 낼 줄 알아야 한다.

20, 30대 연극인들이 모였던 어느 토론회에서 예술이 노동인지 논쟁한 적이 있었다. 그날 예술을 노동이라고 표현하길 주저했던 목소리들을 기억한다. 고용주가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노동시간을 산출하기 어렵다고 해서 그것이 노동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상최대의 명제가 아니며 엄연히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다. 예술이 우리의 삶을 집어 삼키지 못하도록, 우리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예술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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