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정 태인 회장은 기업인보다는 산악인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성별과 장애 유무를 떠나 많은 후배 체육인들을 지원해온 그를 지난 12일 만났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인정 태인 회장은 기업인보다는 산악인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성별과 장애 유무를 떠나 많은 후배 체육인들을 지원해온 그를 지난 12일 만났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인터뷰] 이인정 태인 회장

아시아산악연맹·대한산악연맹 이끈

한국 산악운동의 산 역사

90년대부터 체육 꿈나무 장학지원

“더 나은 미래 위해 기업부터 사회공헌하고

여성이 일할 기회·자리 늘려야”

‘창립 30주년을 맞은 강소기업의 회장’, ‘재벌가 사위’. 이런 수식어들만으론 이인정 태인 회장의 생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는 ‘한국 산악계의 대부’로 유명하다. 대학 산악부 최초로 히말라야 마나슬루봉에 오른 원정대의 대장이었다. 첫 산악인 출신 대한산악연맹 회장이자, 연임에 성공해 역대 최장수 회장(2005-2016)이 됐다. 아시아 18개국의 산악인들이 조직한 ‘아시아산악연맹’ 회장을 6년째 맡아 전 세계를 무대로 ‘등산 외교’를 펼쳐왔다. 다소 거친 언행으로 구설에 오른 적도 있지만, 지금도 다수의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다. 한국 최초의 등산 전문지 ‘월간 山(산)’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주한네팔 명예영사로 활동했다.

이 회장은 많은 후배 체육인들을 지원하고 응원해온 인물이기도 하다. 태인의 이름으로 1990년부터 매년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체육·산악 꿈나무들에게 체육장학금을 수여해왔다. ‘여자 핸드볼 전설’ 임오경 감독, 장미란, 이은경 등이 직접 장학금을 전달하고 멘토링도 한다. 2015년부터는 장애인 선수들도 지원해왔다. 최근 장애 청소년들의 평창동계올림픽 관람도 도왔다.

당연히 체육계 내에서도 폭넓은 인맥을 자랑한다. ‘마라톤 영웅’ 고 손기정을 양아버지로 모셨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를 양아들로, 바르셀로나 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 이은경과 ‘역도 영웅’ 장미란을 양딸로 삼았다. 2015년 ‘클라이밍 황제’ 김자인의 결혼식 날 주례도 그가 섰다.

현재 그의 아들 이상현 대표가 이끄는 태인은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은 반도체와 전기차단기 전문제조업체다. 이 회장을 포함해 세 명의 공동 창립자가 청주로 내려와 1987년 창업했다. LS산전의 전신인 금성계전에 누전차단기 반제품을 납품하면서 사업 규모를 키웠다. 1992년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고, SK하이닉스 반도체를 통해 IBM, HP, 델(Dell), 히타치(Hitachi) 등 세계 각국에 태인의 메모리 모듈 제품을 수출했다. 창립 10년 만에 충청북도가 뽑은 으뜸기업으로 지정됐다. 2017년 기준으로 직원 수 167명, 연매출 약 370억원의 강소기업이다. 성실납세자로 선정돼 1994년, 1998년, 2006년, 2015년 당국의 표창을 받았다. 여러 사회 공헌 활동에 힘써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선정 ‘충북지역 착한기업 1호’로 선정된 바 있다. 

이 회장은 개인적인 기부도 이어가고 있다. 2013년 한국의 대표적인 고액 기부자 모임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해 1억원을 기부했다.

그는 “기업경영과 등반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공통점은 “정상이라는 목표를 찾아 나아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 좋은 성과를 거두거든 사회에, 직원들에게, 더 낮은 곳에 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기업의 이윤은 사장이 가져가는 게 아닙니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놓는 것이지요. 건방진 얘기일지 모르지만. 하하.”

 

4월 12일 여성신문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이인정 태인 회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4월 12일 여성신문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이인정 태인 회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 화려한 이력을 갖추셨습니다. 

“나는 엉터리 사장입니다(웃음). 회사 일은 아들(이상현 태인 대표)이 맡아 잘 살피고 있고, 요즘은 국내외를 오가면서 전 세계의 산악인들과 교류하고 행사를 기획하고 있어요. 80년대까지는 산에서 살았어요. 아내도 산악부 출신이고, 산이 인연이 돼 만났죠. 히말라야에 한 번 가면 2~3개월은 돌아올 수 없었지만, 생활비도 꼬박꼬박 챙겼고 집안을 내동댕이치진 않았습니다.”

- 요즘도 산을 타시나요?

“등산은 하지만 작년부터 바위는 안 탑니다. 72세까지는 탔는데.... 산이 무섭습니다. 사람은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겸손해야 해요.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냅니다. 다들 마음이 똑같아요. 살아서 돌아가게 해달라는 기도죠. 내가 장례위원장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박영석(2011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등정 중 실종된 고 박영석 대장)이, 고미영(2009년 히말라야 낭가파르밧봉 등정 중 추락해 사망한 한국의 대표적 여성 산악인) 등등 잃어버린 이들이 얼마나 많나요.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목격하면 산이 싫죠. 그래도 산으로 가야 하는 게 산악인의 운명이야. 겸손해야 하는데, 아직도 나는 까불고 다니는 것 같아(웃음).”

- 태인의 슬로건 ‘사람이 중심이다’는 회장님이 히말라야 등반을 통해 얻은 개인적 신념이 반영된 구호라고 들었습니다. 경영 일선에서 어떻게 실천해 오셨나요.

“어려운 게 아닙니다. 남을 우습게 알면 안 된다는 거지요. 세상에 태어난 건 다 축복받을 일이니까. 직원들이 노력한 만큼 잘 챙겨주려고 해요. 1년에 열댓 명씩 선정해서 해외연수도 보냅니다. 자녀들 학자금도 지원하고요. ‘사장이 주는 돈이지만 사실은 임직원들의 고생으로 얻은 적지만 고귀한 돈이니까, 여러분도 힘들어도 남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을 갖자’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해왔습니다.

또 매년 체육·등반 꿈나무들에게 장학금을 전하고 있습니다. 체육장학금을 받은 선수들이 성장해서 전국체전에서 메달도 따고, 국가대표로도 활약하고 있어요. 큰 보람을 느낍니다. 최근 평창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에 참석했는데 감동이었죠. 우리가 이런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도 컸고요. 더 많은 인재들이 제 능력을 갈고닦아 빛낼 수 있도록 다른 기업들도 많이 공헌활동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약자를 돕자는 거, 사실 당연한 얘기죠. 우리나라 국민소득(GNI) 3만불 시대가 코앞이라는데, 그걸 자랑할 게 아니라 사회복지에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기업이 앞장설 필요가 있다고 봐요.”

- 사회복지뿐 아니라 성평등 확산에도 기업이 앞장설 때라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한국의 기업, 내각 모두에 여성들이 일할 자리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2014년 조선일보가 기획한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원정대’를 응원하러 독일에 갔습니다. 앙겔라 메르켈 수상부터 주요 부처 장관까지 여성들의 활약이 빛나더군요. 태인의 부서 책임자 다수가 여성입니다. 전체 167명 중 여성이 90명이고, 섬세하고 근면하며 크게 활약하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다만 일·가정 양립이 힘든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일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게 안타깝죠. 이제 한국에는 여성가족부도 있고, 여성신문도 있습니다. 예전보다는 평등해졌다지만 아직 여성의 지위가 올라가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여성들이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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