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페미니즘’이라는 낙숫물, 결국 ‘바위’를 뚫는다”
[만남] “‘페미니즘’이라는 낙숫물, 결국 ‘바위’를 뚫는다”
  • 이하나 기자
  • 승인 2018.04.24 16:44
  • 수정 2018-04-30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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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허라금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원장

77년 문 연 한국여성연구원

한국 여성학 정초시킨 산파

90년대 여성학과 늘어나며

페미니즘 관심 커졌으나

호주제 폐지 이후 잠잠

페미니즘으로 사회 변화

어렵다는 회의론 있었지만

‘미투’라는 연대로 이어져

학계에서도 꺼리던 용어

‘미투’ 다루며 쓰는 언론

여성학 수업에서 다루던

이슈가 일상으로 스며들어

 

허라금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원장은 “낙숫물이 결국 ‘바위’를 뚫듯, 가랑비에 옷이 젖듯 여성학과 여성운동이 변화를 만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허라금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원장은 “낙숫물이 결국 ‘바위’를 뚫듯, 가랑비에 옷이 젖듯 여성학과 여성운동이 변화를 만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금 한국은 ‘미투’(#Metoo, 나도 말한다) 혁명 중이다. 문화예술계, 학계, 정계 등 분야를 막론하고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허라금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원장은 “미투 운동은 폭로의 정치를 넘어 ‘나도 그렇다’는 연대의 외침이 있어 강력한 힘을 가진다”고 분석했다. 피해자와 지지자들의 강력한 목소리를 통해 그동안 ‘불운한’ 개인의 일로 치부되던 성폭력이 국가와 사회가 법, 제도, 정책과 성차별적 문화를 바꿔야 하는 정치 의제라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여성들의 말문이 트인 배경엔 한국 사회를 휩쓰는 페미니즘 물결이 있다. 허 원장은 “낙숫물이 결국 ‘바위’를 뚫듯, 가랑비에 옷이 젖듯 여성학과 여성운동이 변화를 만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가 이끄는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은 한국에서 페미니즘 연구로서의 여성학을 소개하고 확산하는 구실을 한 기관이다. 1977년 창립해 여성학을 대학의 강좌로 정초시키는 작업을 시작으로 여성학 대학원 과정을 설치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 특히 농촌여성, 한국여성사, 지역사회여성, 지구화와 여성, 아시아 여성학 등 새로운 연구 의제를 개발하고 다양한 연구를 통해 축적된 자료와 이론적 성과는 한국 여성학의 학문적 발전에 공헌해왔다. 한국여성학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철학도였던 허 원장은 1995년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로 부임해 23년간 여성학을 가르쳤다.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소장을 지낸 그는 지난 2월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허 원장은 최근 여성학의 흐름에 대해 “초기 여성 연구가 기존 학문과 방법론의 틀 안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연구하며 변화를 추구했다면, 지금은 틀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며 페미니즘과 여성학에 대한 백래시(backlash·반격) 역시 ‘틀’을 뒤흔드는 움직임에 대한 반발이라고 분석했다.

90년대 소위 ‘팔리던’ 페미니즘은 호주제 폐지 이후 주춤했다. 호주제가 사라졌으니 어느 정도 성평등이 이뤄졌다거나, 오히려 ‘여성상위시대’라며 역차별을 운운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부터다. 자연스레 2000년대 들어 여성학과는 차례로 폐지되는 홍역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최근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은 여성학의 인기로 이어지고 있다. 일상의 성차별에 눈 뜬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하기 위해 찾는 경우가 많다. 한국여성연구원도 시대에 화답하기 위해 미투 관련 연속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지난달 성폭행 피해 경험을 토대로 쓴 자전 소설 『다크 챕터(Dark Chapter)』 저자인 위니 리 작가를 초청해 ‘미투 운동이 가야 할 길’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고, 5월에도 지속적으로 포럼과 특강을 열 예정이다. 허 원장은 “연구기관으로서 미투에 대해 면밀하게 토론하고 학문적 연구로 의미를 축적해야 간다”며 “그것이 미투 운동이 가야 할 방향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허 원장은 이어 “미투가 확산되면서 매스컴을 통해 ‘권력 관계’ ‘위계에 의한’ 등 여성학 수업시간에만 쓰던 표현을 매일 뉴스를 통해 접하고 있다”면서 놀라워했다. 그는 이어 “미투가 여성학을 사회적으로 교육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며 “하지만 조직 내 상하 관계가 분명한 ‘권력형’ 성폭력에는 공분하면서도 아직까지 일상 속 성별 권력관계에 대해선 이해와 공감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여성연구원이 올해로 창설 41주년을 맞았습니다. 연구원은 한국여성학 역사와 맥을 같이 합니다.

“이화여대에 처음 여성학 강의가 열리고 어떤 선생님이 어떤 분야를 가르칠 것인지 준비하는 과정에서 함께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선생님들이 한국여성연구원을 만들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초기 여성학 프로그램을 만들고 박사학위 과정 개설에 역할을 한 여성연구원이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정초시킨 산파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요. 초기 여성연구원은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거나 학문적 연구 주제로 다뤄지지 않았던 이슈를 발굴하는 작업을 많이 했어요. ‘발견의 맥락’이라고 합니다. 당시는 국가나 연구재단에서 제도적으로 연구가 활발하지 않았어요. 여성교육의 선구주체로서 여자대학교의 존재 이유와 역할을 고민해야 했던 이화여대였기에 여성연구원의 설립과 운영도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학이 한국에 뿌리 내린지 34년이 흘렀습니다. 여성학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여성운동과 여성학이 결합해 한국사회의 변화를 이끌어왔어요. 여성학은 여성을 학문적 대상으로 삼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어요.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인간은 성별과 환경에 따라 처지가 다른데 왜 인간으로 묶어서 이야기하는지 되묻는 거죠. 여기서 인간은 사실상 남성이잖아요. 초기 여성학 교과 과정도 ‘경제발전과 여성의 지위’, ‘한국여성과 종교’, ‘한국의 농촌 여성’ 등 학문에서 배제돼온 여성을 발굴하는 내용으로 구성했어요. 기존 학문과 방법론 안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연구해온 거죠. 지금은 여성에 대한 분석 연구에만 머물지 않고,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여성의 문제를 보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나아가고 있어요. 예를 들어 과거에는 사회학이라는 틀 안에서 기존 방법론으로 여성을 연구했다면, 최근에는 사회학이라는 틀 자체가 과연 여성의 문제를 이해하거나 여성의 삶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틀인지를 문제 삼는 거죠. 여성학이 기존 학문 영역과 만나면서 기존 학문영역 자체도 변화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 몇 년 새 페미니즘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조롱이나 백래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여성 연구가 병렬적으로 기존의 논리와 언어 체계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 있는 여성을 대상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크게 문제 삼지 않았죠. 이제 거기에서 벗어나 틀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반발이 심해지는 것으로 생각해요. 우리끼리 이렇게 이야기해봤자 사회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했던 적도 있어요. 하지만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이슬비에 옷이 젖듯 사회 이슈가 터질 때마다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온 것이 결국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들의 목소리는 증발된 것이 아니라 흡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요. 핵가족화되면서 자녀 수가 한두 명으로 줄고 딸도 제대로 공부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IMF를 거치고 세계화가 이뤄지고, 인터넷을 통해 월드와이드 시대가 됐잖아요. 여러 조건들이 숙성되면서 여성들이 이야기하게 만들고, 그 목소리의 등장에 기존 사회가 불안과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거리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구경을 하잖아요. 전선을 형성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어나고 대중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가지 현상도 나타나고 있어요. 온라인 상에서 페미니즘 논쟁이 벌어질 때 팬덤 문화가 드러나는 것도 그 중 하나예요. 연구해볼만한 주제예요. 팬덤 문화가 장단점이 있는데, 열정을 갖고 자기 문제로 삼는다는 점에선 살아있는 페미니즘을 만드는 장점이 있고 동시에 스타들이 만들어지면서 진영을 나눠 일종의 진영 논리로 소모적인 논쟁이 이어지기도 하거든요.”

-과거에 비해 페미니즘과 여성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졌죠.

“80년대 초 여성학 과정이 개설된 후 90년대까지 관심이 높았어요. 실제로 여성학과를 개설한 대학이 생겨나고 여성학과 지원자도 많아 경쟁률도 높았고요. 그런데 여성부가 만들어지고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여성학에 대한 관심도 줄었어요. 어느 정도 성평등이 이뤄졌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요. 알파걸 열풍이 불고 능력으로 승부하겠다는 여성들은 자기개발서를 소비하기 시작했어요. 여성학에 눈을 돌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자연스레 여성학과와 여성학 협동과정이 폐지되고 여성학과 지원자도 줄었어요. 그런데 10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어요. 법·제도는 바뀌고, 명시적인 차별 조항은 사라졌지만, 문화는 전혀 바뀌지 않은 거예요. 공기는 하나도 안 바뀌는데 이정표들만 바꿔놓은 거죠.”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의 문을 활짝 연 허라금 원장. 여성연구원은 여러 연구팀들에게 공간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의 문을 활짝 연 허라금 원장. 여성연구원은 여러 연구팀들에게 공간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미투’ 얘기를 빼놓을 수 없죠. 사적인 일로 여겼던 성차별, 성폭력 문제가 사회 문제로 가시화 되기 시작했어요.

“그동안은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말하기’가 무모한 행위로 받아들여지던 환경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여성들의 말하기가 받아들여지는 환경으로 변화한 거예요. 미투는 ‘나도 그랬다’고 말하며 힘을 보태는 연대의 성격이 강해요. 이것은 여성들이 말할 수 있는 용기 뿐만 아니라 나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거든요. 이렇게 시작된 미투가 우리 사회 문화를 바꾸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죠. 조금씩 변화가 느껴지긴 해요. 성희롱 문제에 ‘호감 표현인데 성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반응을 하면 오히려 의식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잖아요. 미투를 통해 여성학을 사회적으로 교육시키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동안 ‘위력에 의한’ ‘권력 관계’ 같은 표현은 여성학 수업시간에 쓰던 것들이고, 학계에서도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런 표현들이 요즘 매일 소위 주류 언론에 등장하고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여져 있는 것을 보면 정말 놀라워요. 무엇보다 법정으로 간 성폭력 사건에 어떤 판결이 나오는지가 중요해요. 그 결과가 미투 운동의 방향과 성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거든요. 어렵게 용기냈던 사람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제대로 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끝까지 지켜봐야죠.”

-여성연구원은 미투 등 다양한 이슈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요.

“그동안 여성연구원은 연구기관으로서 이슈에 신속하게 대응하기보다는 사회적인 흐름을 읽고 의미를 분석하는 작업을 해왔어요. 연구재원이 부족한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미투 등 이슈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장기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에요. 구체적인 주제를 발굴하고 연구팀들에게 공간을 지원해 동기부여도 할 생각입니다. 특히 미투의 경우, 학문적 연구로 의미를 축적할 수 있도록 3월부터 특강과 포럼을 진행하고 있어요. 그것이 미투 운동이 가야 할 방향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포럼과 특강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주길 부탁 드려요.”

 

허라금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원장

이화여대에서 철학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를 마친 뒤 서강대 대학원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이화여대 여성학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여성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생명·사회·정의 등의 주제를 연구해왔다.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소장, 한국철학회 부회장, 한국여성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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