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 운동의 전개는 남자로서 살아온 필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페미니즘을 배우기 시작한 대학 시절 이후 줄곧 페미니즘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과연 내가 배운 대로 살아왔나 반성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알려진 사례들처럼 권력을 이용해서 여자에게 내 욕구를 표현한 적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다. 다만 개인적으로 사귀고자 했던 혹은 사귀는 과정에서 ‘남자답게’ 내 욕구를 (능동적으로) 일방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상대 입장에서는 위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상황을 만들었던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랬더니 어느 여성학 교수가 툭 이런 말을 던졌다. “왜요? 남자 자체가 한국사회에서는 권력인데.” 그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교수가 가진 권력이라고 성적이나 졸업을 미끼로 학생에게 위협적인 상황을 만든 적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다. 그래서 위계나 위력에 따른 성폭력과 무관하게 살았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투 운동을 보니 개인적 차원의 사귐에서 표현했던 행동들이 좀 무리였었나 싶은 나름대로 반성을 한 것이었다. 나의 사귐에서 권력 관계는 없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한 내 생각의 한계를 분명하게 짚어준 말이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두운 골목길, 밤늦은 시간 엘리베이터 안뿐 아니라 심지어 보는 눈이 많을 수 있는 지하철에서도 남자는 여자에게 성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오는 현실을 늘 이야기했다.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여자의 심리나 행동을 위축시키는 권력 기제로 작용하는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상황을 해석하는 과정에서는 ‘권력 관계’를 빼놓고 순수하게 ‘개인적인 관계’만 떠올린 것이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이미 대학교 시절에 읽은 그 유명한 문구의 의미를 나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준말)이다. 다른 남자에게는 엄격한 해석을 했지만, 나에게는 관대한 이야기를 반성이랍시고 했는데, 그 여성학 교수께서 한계를 지적해 줬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여성을 만드는 남성적 권력 ⓒ정재훈
여성을 만드는 남성적 권력 ⓒ정재훈

결국 #미투 운동은 남성으로서의 내 모습을 이렇게 보여준다. 집단으로서 남성을 피라미드로 표현해보자.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피라미드식 관계를 결정하는 토대는 ‘남성이 중심이 되어 여성을 만들게 하는 남성적 권력’이다. 이 피라미드의 맨 밑에 대다수 남성이 있다. ‘나를 돌봐주고 내 욕구를 언제든지 들어주는, 들어줘야 하는 여성’ 이미지를 갖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남성다움으로 알고 살아온 남성이다. 사랑·친근감으로 표현한 내 욕구가 내 (잠재적) 여자친구와 배우자에게 위협과 불안일 수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다수 남성이다. 여기에서 한 단계 올라가면 여성의 모습을 자신의 시각에서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남성적 존재감을 과시하는 남성이 있다. 성희롱의 경계를 넘나드는 언행을 통해, 자신의 남성다움을 수단으로써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인정투쟁(?)식 생활을 하는 남성이다. 그리고 이 피라미드의 제일 위에 남성다움을 무기로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남성이 있다. 이쯤 되면 단순한 존재 과시에서 더 나아가 여성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흔히 말하는 위계·위력에 따른 성폭행 가해자로서의 남성이다. ‘여성을 만드는 남성적 권력’의 피라미드 가장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사회 남성 피라미드의 가장 밑에 남성다움을 규범화한 절대다수 보통남성이 있다. 그 위에 남성다움을 수단으로 인정투쟁식 존재 과시를 하는 또 다른 남성이 있다. 피라미드의 정점에 남성다움을 무기로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남성이 있다. #미투 운동은 그러한 남성의 모습을 다 드러내준다. 함께 생각해 보자. “나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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