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기사: “더 이상 동료 잃고 싶지 않다” 배우 이영진이 목소리 낸 이유)

 

배우 이영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배우 이영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최근 여성인권을 위해 목소리 내는 연예인들을 향한 백래시(backlash·반격)가 심각합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요.

“여성 연예인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퇴보했다고 느껴져요. 권력의 방향이 뚜렷이 보이죠. ‘한류의 중심’이라고 여겨지는 아이돌을 우리사회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돼요. 물론 여성(혐오) 문제도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아이돌을 소비하는 왜곡된 인식이 기본으로 깔려있어요. ‘내가 널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내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돼’라는 생각이 근본 원인인 것 같아요.”

-동료들과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종종 얘기를 나누시나요.

“제가 먼저 하진 않아요. 잘못하면 강요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현재 페미니즘 운동에서 안타까운 지점은 ‘모두의 속도가 같을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지 않다는 거예요. 견고한 가부장제를 토대로 한 한국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 중 완전무결한 페미니스트는 없을 거라고 봐요. ‘나는 뼛속부터 세포 하나하나가 다 페미니스트야’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죠.”

-연예계 내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오가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생각보다는 많이 오가요. 젊은 또래집단에서 더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30대가 넘어가면 윤리적인 잣대가 세워지죠. ‘우리 사회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디폴트(기본 설정값)인데,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럴 땐 이게 낫지 않을까’라는 조언들이 오가요. 저보다 윗세대로 올라가면 양극화가 일어나기도 해요. ‘나 때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우리 밑 세대들이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고, 또 다른 분들은 ‘우리 땐 더했어!’라고 하기도 하죠. 그런데 사실 그렇잖아요. 인간 군상이 심플하게 나뉠 수 없고, 개개인마다 사고회로도 다양하잖아요. 모두의 평균점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서 지치지 말고 무뎌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도 사람인지라 나아져야지 다짐했다가 또 좌절했다가 힘내야겠다고 생각하기를 반복해요. 그래도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 볼 때면 (성평등한) 사회에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영화 내 여성 역할의 다양화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신 바 있는데요. 말씀하신 대로 주류 상업영화 내 여성 캐릭터는 대개 ‘성녀’ 혹은 ‘창녀’예요.

“보통 여성은 가족에게 헌신하는 엄마, 혹은 가족에게 버림받은 엄마로 등장하죠. 또 언젠가 매니저에게 농담 삼아서 한 말이 있어요. ‘2016년 나의 직업은 술집 언니냐’고. 그때 시나리오 6~7개를 보는데 역할이 다 그랬어요. ‘중국에서 들어온 불법이민자인데 룸살롱에서 일하며 맞는 여자’, ‘고급 콜걸’, ‘마약중독자’ 등. 물론 그런 역할 할 수 있죠. 그런 역할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고민해봐야 하죠. 여성을 너무 당연하게 ‘소비되는 존재’로 그리는 거잖아요.”

 

배우 이영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배우 이영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나오기 위해선 어떤 노력들이 필요할까요.

“지금 있는 남자 캐릭터를 여자로만 바꾸면 돼요.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없으니 그 정도 수준에서 머무는 거잖아요. 일단 시나리오에 있는 모든 남성을 여자로 바꿔보자고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잖아요. 여자도 검사 있고, 판사 있고, 막노동꾼 있고, 농부도 있고 과학자도 있어요. 직업별로 여성이 하면 안 되는 노동계층이나 사회계층은 없잖아요.”

-연예계 내 여성 연대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아직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여성들은 각개전투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미디어와도 척을 지기가 힘들죠. 저만 해도 하고 싶은 말이 왜 없겠어요. 하지만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목소리만 내고 있어요. 그 이상이 과도하게 주어지면 제 스스로도 망가지고 상처받을 거예요. (제가 공격당할 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본인이 견딜 수 있는 능력이 10인데 주어진 짐이 100일 때는 자멸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 이제 잠시 쉬실 건가요?

“저는 제게 주어진 발언권도 누군가는 기득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어요. 저는 한 사람이 강하게 많은 얘기를 하는 것보다 약하더라도 다수가 얘기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제 신념이 뭐가 바뀌겠어요. 반 팔십 살아서 이 정도 만들어졌으면 반 백 년 살아도 똑같다고 봐요. 그럼 이제 다른 분들에게 마이크를 넘길 때인 것 같아요. 아예 마이크를 끄겠다는 게 아니에요. 들고 있을게요. 다만, 제가 그런 이미지로 비칠까봐 겁나요. 한 사람이 특정 주제에 대해 독점적으로 발언하면 꺼려지는 게 있잖아요. 그 사람의 전유물처럼 보이고. 근데 페미니즘이 누군가의 전유물은 아니잖아요. 또 한 사람에게 짐을 지워서도 안 된다고 봐요. 더 많은 분들이 발언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성 연예인들의 말하기가 자유로워지는 환경은 언제쯤 만들어질까요?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그런데 그동안 피해자가 얼마나 나올지 예측이 안 된다는 점에서 두려워요. (성폭력 비판 여론이) 사그라지면 언제든지 기어 나올 수 있는 범죄가 성범죄인 것 같거든요. (미투 운동이나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아직도 크니까 앞으로 계속 나아가지 못하고 있잖아요. 이럴 땐 만원 지하철처럼 등 떠밀어서 밀어 넣어야 해요. 이런 식으로라도 가야 한 정거장이라도 가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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