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서 22년 동안 일하고 임원이 된 필자가 직장생활을 잘하기 위해 고민하는 여성 직장인들에게 선배로서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주>

 

 

1995년 입사 초기, 소비자의 환경친화적 인식과 소비행동에 대해 설문조사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프로젝트는 ‘기획안 – 2차 자료 조사 – 소비자 대상 설문조사 – 분석 및 보고’ 순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일을 신속하게 또한 적은 비용으로 잘 하고 싶은 마음에 2차 자료 조사는 당시 대학원 박사과정을 다니고 있던 후배에게 부탁했습니다. 그 후배는 제가 입사하기 전에도 산학협동 프로젝트를 진행할 시에 같이 일을 많이 했던 친구였습니다. 능력도 있고 똑똑하고 무엇보다 성실하고 겸손한 성품이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그 후배는 제 맘에 쏙 들게 환경친화적 소비자의 인식과 행동에 관한 다양한 선행 연구자료들을 찾아 줬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모든 게 해결되니 키워드 몇 개만 넣으면 네이버나 구글이 다 찾아 주겠지만, 당시는 PC통신을 사용했기 때문에 직접 국립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에 가서 연관성이 높은 연구 논문이나 프로젝트 보고서를 찾아서 복사를 하고, 저의 프로젝트에 활용할 만한 내용을 요약 정리하는 복잡하고 노력과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그 후배에게는, 적정한 수고비를 주기로 했습니다. 물론, 전문조사업체에 용역을 주고 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했고, 저와 손발을 잘 맞춘 후배였기 때문에 자료의 정리결과도 깔끔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후배에게 수고비, 즉 요즘 용어로 하면 알바비를 지급하기 위해 사내의 지급 프로세스를 진행하던 중, 지원팀장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왜 학교 후배에게 이 조사를 맡겼나요?(혹시 후배로부터 뒷 돈을 받았나요? 라는 의미)”, “회사의 절차에 이런 경우 협력업체 후보로부터 복수견적을 받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네요.” “후배보다 더 잘 하고 더 저렴하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저는 너무 놀라서 구구절절 왜 학교 후배를 통해서 2차 자료 조사를 진행했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원팀장은, 저를 1시간 정도 “야단”쳤습니다. 저는 그 지원팀장의 책상 앞에 선 채로 한 시간을 야단을 맞았지요. 나중엔 저도 모르게 눈물까지 솟아 올랐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회사 돈을 아끼고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더 저렴하고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확신해 학교 후배에게 일을 부탁했고, 실제로 그 결과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지원팀장이 따지고 드는 포인트는, 마치 제가 일부러 후배에게 경제적인 이득을 주기 위해 일부러 후배에게 일을 줬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했던지요.

그런데 1시간이 넘도록 설명을 받고 나서야 저는, 회사에서의 일이란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성과와 프로세스가 매우 중요하고, 그 프로세스는 대체로 부정과 비리가 없고 최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준비돼 있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외부에 용역을 줄 때는 반드시 복수 견적을 할 것, 가능하면 지인을 활용하지 않도록 하되, 만약 지인이 최선의 선택이라면 그것을 사전에 설명하고 허락을 받을 것 등. 1시간의 야단 세션이 지난 후에 지원팀장이 제게 다짐을 요구했습니다.

S전자가 더 큰 글로벌 회사가 된 후에는 이런 프로세스가 시스템으로 구축됐고, 이 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결제와 더블체크가 진행돼 부정과 횡령이 아예 발생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정기적으로 있던 내부 감사에서 부정이나 횡령 등의 사례들이 가끔 발각됐고, 저는 제가 입사 초기에 한 시간 동안 눈물을 뺐던 경험 때문에 그런 부정적인 프로세스에 자신도 모르게 말려 들지 않았다는 점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보다 윤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여성이 가진 강점이라고 합니다.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나의 사적인 관계를 우선하느라 조직의 경쟁력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도 중요한 경쟁력입니다.

조은정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소비자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은정 박사는 1995년 삼성그룹 소비자문화원에 입사해 22년간 삼성전자 글로벌마케팅 연구소장, 프린팅사업부 마케팅그룹장 등 삼성전자의 마케팅 및 역량향상 업무를 진행했다. 여성신문에서 재능기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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