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페미니즘 미술의 역사 윤석남 화백

시어머니 모시던 40대 주부

남편이 건넨 월급 털어

화구 구입 “전업 화가” 선언

독학으로 화단에서 인정

화두는 여성·모성·생명

시인 고정희와 작업하며

‘페미니즘’과 운명적 만남

<여성신문> 창간 동참

창간 준비호 등 표지 작업

“우리 여성의 존재 언론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여든 가깝지만 여전히 현역

도시락싸서 작업실 출근

최근에는 민화에 푹 빠져

“여성이라고 주눅들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뚫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윤석남 화백이 유기견 1025마리를 나무판에 깎고 그린 설치작업 ‘1,025’ 가운데 섰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윤석남 화백이 유기견 1025마리를 나무판에 깎고 그린 설치작업 ‘1,025’ 가운데 섰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두 명의 건강한 여성이 한 손에 여성신문을 꽉 쥐고 벽을 뚫고 뛰어 나오고 있다. 그 옆에는 ‘자매애는 강하다’라는 편지의 제목이 보인다. 1988년 10월 28일 수개월의 준비 끝에 여성신문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0호’의 표지는 비장하고 강렬하다. 가부장제라는 두터운 벽을 뚫고 뛰어 나오는 두 여성은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산증인’ 윤석남(79) 화백의 손에서 탄생했다. 근 30년 만에 자신이 그린 표지를 접한 그는 반색하며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여성신문 지령 1500호 발행을 기념해 여성신문 창간 준비호 표지 작업을 맡은 윤석남 화백을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서울에서 그의 작업실이 있는 경기도 화성시까지는 차로 한 시간 거리다. 그는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서 이곳으로 출근해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한다. 예술가이지만 마치 회사원 처럼 출퇴근하며 작품에서 손을 놓지 않는다. 9월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앞두고 작품 준비에 여념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환한 미소로 취재진을 맞았다.

윤석남이라는 이름 석자는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역사를 대변한다.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여성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40년 가까이 여성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망해왔다. 전업주부이자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그는 불혹의 나이에 처음 화구를 잡았다. 13명의 여성작가들과 서울 역삼동에 첫 작업실을 마련하고 자연스레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어머니를 시작으로 여성과 모성, 생명과 자아정체성을 작품의 화두로 삼고 작품 활동을 통해 여성의 억압된 삶을 고발하고 생명과 평화의 소중함을 표현하고 있다. 마흔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는 전문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도 독학으로 1996년 여성 최초로 이중섭미술상을 거머쥐었고 1996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설치작품 ‘어머니의 이야기’로 참여했다. ‘어머니’ 연작, ‘족보’, ‘아들, 아들, 아들’ 10여년 넘게 몰두한 어머니라는 주제는 ‘핑크룸’ 연작, 999개의 여성 소형 목상들을 통해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를 표현한 ‘999’, 조선시대의 여성시인 이매창과 작가가 손을 뻗는 모습을 묘사한 ‘종소리’ 등 자기 자신과 역사 속 여성들로 방향을 바꾼다. 이후 그는 유기견 1025마리를 나무판에 깎고 그린 설치작업 ‘1,025’를 선보이며 여성 이야기를 생명 이야기로 확장시켰다. 그 사이 평면회화였던 그의 작품은 조각으로 입체화됐고, 작품 세계도 여성의 불안한 내면과 억압받는 현실을 넘어 여성의 포용력과 돌봄의 윤리로 넓고 깊어졌다. 윤석남은 책 <핑크 룸 푸른 얼굴>에서 늘어난 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늘어난다는 것은 확장의 의미도 있고, 끄집어내려는 의미도 있다.” 또한 “드로잉 할 때의 늘어남은 나를 다른 사람에게 닿게 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 “가두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튀어나가서 뭔가를 하고 싶고 만들고 싶은 욕망”이기도 하다.

생애 두번째 전시를 하며 “분명히 여성주의에 방점을 찍고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고 결심했던 그는 작품화 문화운동으로 가장 왕성하게 여성주의 시각을 전파해왔다. 이후 40년 가까이 자신이 정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투철한 페미니스트 미술가로 살아온 윤석남 화백은 페미니즘을 “타인을 위한 배려”라고 정의했다. 이기적이고 남성중심적 세상에서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것은 여성성이라는 것이 그가 삶을 통해 얻어낸 결론이었다. 김혜숙 시인의 말대로 윤석남 작가의 작품은 “눈에서, 손에서, 길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여성신문 창간 준비호 표지를 보고 있는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성신문 창간 준비호 표지를 보고 있는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주부로 살다가 40대에 화단에 등단하셨어요.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하고 바로 조선전업 사무원으로 취직했어요. 대학을 가고 싶단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게 19살에 입사해 결혼하기 전까지 9년을 다녔죠. 회사는 적성에 안맞았어요. 회식 자리에 갔는데 ‘술은 여자가 따라야 맛’이라느니, ‘술 안따르려면 노래 부르라’느니 하더라고요. 그때 ‘산토끼’를 불렀더니 다시는 시키지 않더라고요. 결혼은 스물 둘에 고등학교 동창이던 남자를 소개받고 6년을 연애하고 늦게 했어요. 손을 가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믿음이 가는 남자였어요. 나중에 남편이 벌어 반포에 32평짜리 아파트에서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았어요. 그런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서른 여섯에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4년차 때 ‘임서기간이 20년은 돼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그 길로 그만뒀죠. 그래서 찾은 게 그림이었어요.”

 

-가족의 반대는 없었나요.

“남편은 말리거나 반대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그림을 그리기로 하고 남편의 한달치 월급을 몽땅 털어서 화구를 사왔는데 남편이 뭐라고 했는지도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처음부터 취미로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전력을 다했죠. 운 좋게도 그림을 시작하고 3년 만에 개인전을 열었는데, 남편이 ‘당신, 그림 계속 그릴 거야?’라고 묻더라고요. 곧바로 ‘물론이지’라고 했죠. 작업을 할 때 필요한 돈은 주부로서 받은 월급을 그림 그리는데 쓰는 거라고 생각하고 썼어요. 실제로 난 시어머니도 모시고 살림도 했거든. 주부로서 할 일 다 하고 그림 그렸으니 큰 소리 칠만 하지 않나요. 83년부터 1년간 미국 뉴욕으로 유학(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센터와 아트 스튜던트 리그)을 갈 때도 남편이 권했죠. 대학도 안다니고 정식 미술교육도 받은 적 없으니 출세 못한다면서, 공부하고 오라고요.(웃음)”

 

-그림을 시작하셨을 때부터 여성을 작품 주제로 삼으셨어요. 처음 그린 대상이 어머니셨죠?

“처음에 ‘뭘 그릴까’ 하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제일 사랑하는 엄마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집에 작업실을 만들고, 일주일에 이틀 집으로 오시라고 해서 데생을 했어요. 이때 그린 그림이 제 첫 개인전의 모티브가 됐죠. 엄마는 서른아홉에 혼자가 되셨어요. 사랑하던 아버지(윤백남,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명서’감독이자 작가)를 먼저 보내시고 젊은 엄마는 애들 여섯을 데리고 남은 돈을 모아 금호동에 집을 지으셨죠. 하꼬방(판자로 허술하게 지은 집)이라고 하죠. 공부에 뜻이 없어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두고 일하겠다고 했다가 바로 혼이 났어요. 어머니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딱 자르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감사하죠.”

 

-처음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원래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어서 엄마를 빌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여성작가 13명과 함께 역삼동 근처에 작업실을 마련했어요. 김인순, 김종례 작가 등과 함께 했는데 가진 돈이 없으니 모아서 하기로 한거에요. 자연스레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죠. 하지만 이론적인 배경이 없는 거에요. 내 문제를 이야기 하고 싶은데 설명할 수 없으니 두렵잖아요. 처음엔 막연하게 혼자서 공부했어요. 페미니즘 관련 미국 책을 찾아보면서. 그러다가 고정희 시인, 김혜숙 시인 등과 여러 여성 작가들이 함께 시화전을 열면서 ‘또문’(또 하나의 문화)를 만나게 된거죠. 거기서 여성주의를 접했어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계속 찾아갔어요. 내가 왜 여성을 주제로 이런 작업을 하는지 궁금했거든요. 그곳에서 고정희 시인(여성신문 초대 주간) 등을 통해 여성신문 창간 소식을 듣고 참여하게 됐죠.”

 

윤석남, 종소리, Mixed Media, 2002. 조선시대 시조시인이었던 기생 이매창과 작가를 상징하는 두 여성은 팔을 뻗어 시대를 뛰어넘는 만남을 표현한다. ⓒ윤석남
윤석남, 종소리, Mixed Media, 2002. 조선시대 시조시인이었던 기생 이매창과 작가를 상징하는 두 여성은 팔을 뻗어 시대를 뛰어넘는 만남을 표현한다. ⓒ윤석남

-초기 여성신문 표지 작업에 여러차례 참여하셨어요.

“정말 여성신문 창간은 말도 안되는 역사적인 일이었어요. 우리의 존재를 언론화하는 일은 정말 기쁜 일이었죠. 그래서 표지 작업에도 기꺼이 참여했어요. 처음에는 솔직히 얼마나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매체를 만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워요. 그런데 이렇게 30년이나 됐다니 기특하고 감사하죠.”

 

-흔히 페미니즘 미술로 주류 화단에 진출하기 쉽지 않다고 합니다.

“화가로서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그런데 유명해지기 위해 내가 원하지 않은 작업을 할 수는 없어요. 왜 하기 싫은 걸 하고 있겠어요. 하고 싶은 것만 해도 모자른데. 저는 평생 여성주의 미술 하겠다고 다짐했으니까요.”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고 계세요?

“민화에 푹 빠졌어요. 민화는 참 자유스러워요. 부귀영화, 무병장수 등 주제는 단순해요. 서민들의 그림이라 낙관도 없고 그림의 제목도 없지만 선과 색의 아름다움과 있는 그대로의 순수함이 참 좋아요. 현대미술이 이해하기 어려운 반면 민화는 누구나 그림의 아름다움을 바로 느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최근 붐이기도 하고요.”

 

-여성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여성으로 태어났으니 얼마나 복이에요. 여성이라서 주눅들거나 위축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뚫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남성은 적대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함께 나아갔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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