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삶을 바꾼 30대 사건 ⑤ 여성부 출범

여성계 열망으로 탄생

새 정권 들어설 때마다

부처 명칭·기능 바뀌어

 

1988년 5월 15일 열린 임시국회에서 평민당 박영숙 의원이 강영훈 국무총리를 향해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현재 분산돼 추진되고 있는 여성정책을 일관성 있게 수립, 집행할 수 있는 여성부를 신설할 용의는 없는가”라고 질의한다. 여성신문 25호(1989년 5월 26일자) ⓒ여성신문
1988년 5월 15일 열린 임시국회에서 평민당 박영숙 의원이 강영훈 국무총리를 향해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현재 분산돼 추진되고 있는 여성정책을 일관성 있게 수립, 집행할 수 있는 여성부를 신설할 용의는 없는가”라고 질의한다. 여성신문 25호(1989년 5월 26일자) ⓒ여성신문

여성가족부 17년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다. 여성들의 열망을 담아 2001년 출범한 여성부는 수차례 존폐의 위기를 넘어서야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최고 통치권자의 의지나 성향에 따라 부처의 규모는 늘거나 줄었고, 그 과정에서 역차별을 조장한다는 비난과 여성혐오 대상으로서의 조롱을 감수해야 했다. 성평등정책 전담 부처로서 전문성과 역량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여성신문에 여성부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25호(1989년 5월 26일자)부터다.

당시 기사는 제146회 임시국회가 열린 5월 15일 강영훈 국무총리에 대한 박영숙 평민당 의원의 질의를 통해 여성부의 당위성을 대변한다. 사회·문화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박 의원은 “여성에게 불평등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사회 발전의 질을 높여야 할 때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현재 분산돼 추진되고 있는 여성정책을 일관성 있게 수립, 집행할 수 있는 여성부를 신설할 용의는 없는가”라고 강 총리에게 질의한다. 이에 강 총리는 “정부는 6공 출범과 함께 정무제2장관에 여성을 임명했으며, 각 시·도에 가정복지국을 신설했으며 여성정책심의위원회를 두고 각계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다”고 답변한다. 즉, 우회적으로 여성부 신설 의사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여성단체를 비롯해 여성들은 끊임없이 여성정책을 전담할 전담기구를 만들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여성신문 2001년 2월 9일자 612호. 한명숙 초대 여성부 장관 인터뷰를 단독으로 실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성신문 2001년 2월 9일자 612호. 한명숙 초대 여성부 장관 인터뷰를 단독으로 실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최초의 여성정책 전담 국가기구는 정무장관(제2)실(초대 장관 조경희)이었다. ‘정부조직법’ 제18조 등에 의해 1988년 설치됐다. 여성정책을 총괄·조정하는 역할을 했지만 소관 법률이 없으니 집행이 없었고 권한도 작았다. 10년 뒤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으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1998년 3월 정무장관실은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초대 위원장 윤후정)로 개편된다. 하지만 이 역시 여성정책을 총괄하기에는 인력과 예산이 턱 없이 부족했다.

앞서 김대중 대통령은 1997년 11월 여성신문이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 여성정책 토론회(1997년 11월 14일자 450호)에서 여성부 신설을 약속했다. 그 약속은 취임 후 3년 만인 2001년 1월 여성부(초대 장관 한명숙 전 국무총리) 출범으로 실현된다. 당시 여성부 규모는 ‘1국 3실, 직원 102명, 예산 300억원’에 불과했다. 이후 노무현 정부인 2005년 보육업무가 이관되면서 여성부는 여성가족부로 확대된다.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여성부 폐지를 거론하면서 성평등정책을 낡은 것으로 치부했다. 여성계를 중심으로 성평등 사회 실현을 위한 여성가족부 존치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결국 여성가족부를 ‘여성부’로 축소해 존치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되살아난 여성부는 기존 가족 업무를 다시 보건복지부로 이관함으로써 2001년 출범 당시와 비슷한 규모로 예산과 인력이 대폭 줄어든 ‘초미니 부처’로의 한계를 안게 됐다. 하지만 2년 뒤인 2010년 청소년·다문화 가족을 포함한 가족 기능이 다시 여성부로 이관되면서 다시 여성가족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가족 업무를 여성부에 보내는 보건복지가족부도 보건복지부로 회귀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7년 11월 여성신문이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 여성정책 토론회에서 여성부 신설을 약속했다(1997년 11월 14일자 450호).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대중 대통령은 1997년 11월 여성신문이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 여성정책 토론회에서 여성부 신설을 약속했다(1997년 11월 14일자 450호).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처럼 1988년 정무장관(제2)실, 1998년 여성특별위원회, 2001년 여성부, 2005년 여성가족부, 2008년 다시 여성부, 2010년 또다시 여성가족부 등 부처 명칭과 소관 업무는 정권가 바뀔 때마다 부침을 겪어야 했다. 그 사이 장관은 초대 장관인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지은희·장하진·변도윤·백희영·김금래·조윤선·김희정·강은희 장관을 거쳐 현 정현백 장관까지 10명을 배출했다.

존폐 위기를 겪은 여성부는 온갖 루머에도 시달려야 했다.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여성부가 있다거나, 과자 ‘죠리퐁’이 여성 성기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여성부가 유통을 금지를 추진한다는 식의 증거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6년 유엔(UN) 자료를 분석해 발표한 ‘해외 여성정책 추진체계 조사연구’ 보고서를 보면 여성부 같은 여성정책 추진기구를 둔 국가는 2015년 기준 191개국으로, 독립부처 형태는 137개국으로 가장 많았다.

#미투(Metoo) 운동이 확산되고 불법촬영 근절과 성차별 반대를 외치는 여성 6만명이 혜화역에 모였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7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 격차지수는 118위로 최하위권으로 10년 전 97위에 비해 더 추락했고, 남녀임금격차는 36.7%로 16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부동의 1위를 차지한다.

 

젠더폭력과 혐오가 사회통합의 큰 걸림돌으로 지목되고 있는 지금,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거는 기대는 높다. 특히 문 대통령은 여성가족부 기능 강화와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 신설을 공약하면서 성평등정책 추진체계 강화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전망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지난 7월 3일 “성평등 문제를 여성가족부의 의무로 여기지 말고 각 부처의 행정영역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선 각 부처가 책임져야 하는 고유의 업무로 인식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노동, 교육, 문화 등 모든 영역이 함께 나서야 성차별적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인식이다. 대통령의 의지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성평등위원회 조속 설치 등 강력한 추진체계부터 마련돼야 한다. 또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가 추진력을 가질 수 있도록 예산과 인력을 늘릴 필요가 있다. 정부 예산 중 꼴찌인 0.18%(약 7641억원)로는 성평등정책 총괄·조정 기능을 실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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