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무죄판결에 분노한 항의행동’이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비서 성폭행 혐의를 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 무죄판결을 규탄하는 ‘안희정 무죄 선고한 사법부 유죄’집회를 열어 참가자들이 안 전 지사의 사진을 찢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안희정 무죄판결에 분노한 항의행동’이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비서 성폭행 혐의를 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 무죄판결을 규탄하는 ‘안희정 무죄 선고한 사법부 유죄’집회를 열어 참가자들이 안 전 지사의 사진을 찢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판결 지켜본 20대 목소리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심 무죄 선고를 받자 20대들은 대체로 “우리 사회가 성범죄에 얼마나 무감각한지 보여주는 사례”라며 사법부를 규탄했다. 또한 이번 판결로 인해 #미투(Metoo) 운동이 축소되거나 성폭력이 은폐될까 두렵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대학생 윤희진(24)씨는 “사법부의 판결은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윤씨는 “사법부가 안 전 지사를 ‘유력 정치인’ 등으로 그 위력을 인정했음에도 ‘위력을 행사했거나 하는 정황은 없다’라는 판결을 내린 점을 이해할 수 없다”며 “직권이나 자리를 갖는 위력은 굳이 어떤 명령이나 행동이 아니더라도 타인을 유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직장인 윤지혜(25)씨는 피해자와 피고인의 성별을 바꿔 “‘내가 안희정을 간음이나 추행했어도 재판에서 무죄를 받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권력 차를 이용해 여자를 간음·추행한 것보다 공연음란죄가 적용될 수 있는 남자의 사진을 찍어 유포하는 것이 더 큰 중죄인 것을 보고 ‘그간 웹하드를 운영하고, 불법 촬영물을 올리면서 수많은 여성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남성들은 왜 벌을 받지 않지?’라는 의문이 들었다”라고 의구심을 표했다.

이어 그는 “사법부의 판결은 단순히 ‘벌을 주느냐, 마느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 해석의 근간이 무엇인지 담고 있다”며 “안 전 지사에 대한 무죄 선고는 우리 사회가 성범죄에 무감각하다는 것과 동시에 여성이 성범죄에 쉽게 노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대학생 이우섭(28)씨는 “관련 기사에 ‘네 번이나 관계를 가졌는데 그게 성폭행이냐, 당연히 무죄지’와 같은 댓글이 있었다. 이런 의견은 구조적 위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며 “아마 판결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피해자들 입 막고

#미투 위축 우려

 

이번 판결이 앞으로 #미투 운동의 재갈을 물리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이우섭씨는 “판례가 크게 작용하는 법체계의 구조상, 이번 재판 결과에 따라 이후 가해자 판결에도 큰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희선(익명·23)씨는 “권력자를 향한 미투의 대표적인 사례였기 때문에 이번 선고가 대외적으로 많은 피해자의 입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홍혜리(익명·24)씨는 “남은 가해자 판결도 걱정되지만 미투 운동 자체가 지속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며 “권력형 성폭행은 일반 강간죄보다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음에도 미투 운동 자체를 강간죄의 법리 안에 끼워 넣다 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판결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윤지혜씨는 “피해자는 이미 상처를 받은 상황에서 가해자를 고발하는 등 노력을 해도 또다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무엇보다 직장에서의 권력과 위계 아래 생겨나는 모든 성희롱, 성폭력 사건들이 이번 판결을 예로 들며 피해자를 가해하는 상황이 생길까 두렵다”고 전했다.

박찬규(27)씨는 “판결의 이전 사례가 중요하게 작용함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영향이 있을 거라 생각된다. 정확한 증거를 바탕으로 진실된 피해자에 의해 지목된 가해자들은 꼭 적법한 징계를 받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국민의 분노가 결국 사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사법부는 경각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피해자 입장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성적 자기결정권 재해석

‘예스 민스 예스 룰’ 도입도

선고문에서 강조된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동희(익명·25)씨는 “사법부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성관계의 여부를 자유의사에 따라 스스로가 ‘선택’한 것으로 판단하여 무죄 처분을 내렸지만 이는 사회생활에서의 위력이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며 “사회생활에서의 상하 관계에서는 표면에 보이지 않는 다양하고 복잡한 권력이 얽혀져 있다. 이를 조금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피해자로서 불합리한 상황에서 ‘안돼요’ ‘싫어요’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단순 ‘성적 자기 결정권’에 위배됐다는 판결은 너무도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예스 민스 예스 룰’(Yes Means Yes Rule)’ 도입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나왔다. 명시적 동의 여하에 따라 성관계의 처벌이 가능했다면 이번 사건의 판결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곽재영(24)씨는 “김지은씨는 명확한 거부를 하지 못했을지라도, 동의 의사를 표한 적이 없기 때문에 미국과 캐나다의 법에 적용하면 강간죄가 성립하지만, 우리나라 현행법에선 범죄 처벌이 일어나지 않는다”며 “‘동의’라는 용어를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캐나다는 명확하게 ‘Yes’라는 표시가 있어야만 ‘동의’라고 인정하지만, 우리나라는 가해자의 명확한 ‘거부 의사’와 ‘자유의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또한 성폭행, 성폭력, 강간이라는 어휘가 치열한 싸움 끝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없애야 한다”며 “피해자가 조금이라도 거부 의사를 보이거나, 동의의 의사를 보이지 않았으면 강간 또는 강간 미수가 적용되는 ‘예스 민스 예스 룰’ 같은 법이 제정돼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의 성관계 요구에 대해 김지은씨가 명시적으로 동의 의사를 표명한 적이 없고, 거부나 저항 정도에 이르지 않았지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거절하는 태도를 보인 바 있다. 피해자의 진정한 내심에 반하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우리 성폭력 범죄 처벌체계 상 이런 사정만으로 피고인 행위가 성폭력 범죄라고 볼 수 없다”라고 밝혔다.

또한 재판부는 상대방이 부동의 의사를 표명했는데 성관계로 나아간 경우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No Means No rule) 혹은 상대방의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성관계 동의 의사가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성관계로 나아가면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Yes Means Yes' rule)를 도입할 것인지의 여부는 입법정책적인 문제이고 근본적으로는 사회 전반의 성문화와 성인식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고 명시했다.

이번 판결에 낙담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피해자와 함께하겠다는 연대 의지도 보였다.

권희선씨는 “이번 판결이 앞으로의 판결도 변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며 “하루빨리 피해자의 억울함이 밝혀지길 바라며, 또 다른 피해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함께 지치지 않고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나영(23)씨는 “이 판결이 우리 모두에게 상처와 불안감, 절망감을 줬지만 포기하지 말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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