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변호사의 이러시면 안됩니다 - 22]

교수 A씨가 있었다. 일찍이 성생활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던 그는 평소 술을 한 잔 걸치고 싶을 때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자기의 제자인 여학생을 하나씩 따로 불러내어 자신과 함께 마셔줄 것을 은근하게 종용했고, 그런 날이면 으레 ‘애인이 있느냐?’라거나 ‘나 같은 스타일은 남친으로 어때?’라고 하는, ‘구타’를 유발하거나 또는 ‘구토’를 유발하기에 한 치도 모자람이 없는 언사를 끝없이 남발하면서, 마치 사랑하는 애인을 살펴보듯 언제나 그윽한 눈빛으로 제자들의 몸매를 샅샅이 훑어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옆에 앉은 여 제자의 몸에 직접 손을 대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사진 한 장 남기는 법도 없었다. 역시 심오한 비법을 체현한 강호의 고수다운 면모랄까.

어느 날의 일이다. A씨의 술자리 동석 요구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제자 B씨는 굳은 결심을 하고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상세히 적은 고소장을 준비했다. 그리고 경찰서의 문을 두드렸다. 어떻게 될까? 마침내 A씨는 은팔찌를 차고 포승줄로 몸을 칭칭 동여매게 될 것인가!

 

글쎄. 만일 위에서 예시한 내용 이외에 또 다른 사실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A씨의 사건은 불기소처분으로 종결되고 말 것이다. 단둘이 갖는 술자리에 합석할 것을 요구한다거나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 몸매를 뚫어져라 보는 것 등의 언동은 성희롱에 해당할 수 있지만, 우리 법에 이와 같은 사실관계를 형사처벌할 수 있는 근거규정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소가 있었더라도 재판까지 갈 것을 기대하기조차 어렵다.

뭐 이런 법이 다 있느냐고? 무슨 법을 이렇게 ‘거지 같이’ 만들어 놓았느냐고? 이에 대한 의견은 물론 사람마다 다양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게 현재의 우리 법이다.

분노를 잠시만 접어두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법원의 무죄판결 또는 검찰의 불기소처분이 있었다고 해서 행위자에게 아무런 책임도 잘못도 남아 있지 않다고 곧바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A씨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어구 우리 A 교수, 이번에 불기소처분까지 받아서 다 잘 마무리 됐다면서요? 잘했어요, 우쭈쭈! 이제 우리 A 교수한테 누가 감히 돌을 던지겠어요?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아요! 여 제자도 계속 술자리에 부르고 술도 맛있게 마시면서 늘 그렇게 재미나게 살아요! 이제 아주 인생 폈네!” 만일 정말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 해 줄 말은 딱 하나밖에는 없다. “염병하네!”

무죄판결 또는 불기소처분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의 갈래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주장된 사실관계 자체가 인정되지 않아서 무죄나 불기소가 된 경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장된 사실관계 자체는 인정될 수 있지만 법리적 평가에 따라서 그 내용이 범죄로는 인정되기 어려워서 무죄나 불기소가 된 경우.

만약 A씨가 위와 같은 짓을 했다는 주장은 있었지만 증거를 따져보니 실제로는 A씨가 저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행동 자체가 없었는데 책임이 있을 리 없다. 이때의 무죄나 불기소는 흔히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무죄’, 정말로 아무 잘못이 없다는 취지의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A씨의 언동은 사실로 인정될 수 있는데 법리적인 평가의 관점에서 이를 범죄로 판단하기는 어려워서 내려진 무죄나 불기소의 경우. 이와 같은 무죄나 불기소는 한 점 티끌만한 잘못도 없다는 의미의 ‘무죄’와는 전혀 다르다. 후자의 경우라면 우리는 형법 아닌 다른 관점이나 잣대를 동원해서 다르게 판단해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죄’라는 말의 의미는 그 자체만으로 더 이상의 아무런 잘못도 비난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구체적 사안에 따라서 정확한 의미를 새겨야 비로소 그 참된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형사처벌이 비록 좌절되었다 하더라도 마냥 안타까워하며 한숨만 내쉬고 있을 이유도 없다. 실망하지 말자. 형사처벌이 아니더라도 징계처분이나 민사 불법행위 손해배상청구의 길은 아직 열려있을 수 있다. 형사범죄가 아니라고 해서 민사상의 불법행위도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법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필자에게 가장 생경하게 다가왔던 것은 범죄와 처벌에 관해서 정해두고 있는 「형법전」이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권리장전이라는 설명이었다. ‘아니, 범죄자를 잡아다 가두는 얘기만 잔뜩 적혀 있는 「형법전」이 사람들의 자유하고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담?’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선뜻 와 닿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왠지 우리의 생래적인 감정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 같은 이 말에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형법전」이 제대로 작동하기 이전의 국가는, 말 그대로 아무나 함부로 잡아다 ‘족칠 수’ 있는, 없는 죄도 있는 죄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죄가 된다고 나를 잡아 왔나요? 억울하오!’라며 대들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론가 끌려가서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범죄가 있기에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잡아다가 고문하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주조해 낼 수 있었던, 그런 시대가 분명히 역사에는 있었다.

법에 쓰여 있는 것만을 국가가 형벌권을 발동하여 처벌할 수 있다는 뜻, 이른바 ‘죄형법정주의’라는 원칙은 법에 범죄로서 쓰여 있지 않은 한 우리 모두는 국가의 눈치를 볼 것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형법전」이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중요한 문서라는 말의 진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국가가 아무나 잡아다 가둘 수 있었던 엄혹한 시절을 살았다. 우리가 두 번 다시는, 정말이지 두 번 다시는 그런 야만의 시대로 회귀해서는 안 되기에 법에 문자로 명시되어 있지 않은 한 범죄를 구성하는 요건에 대한 해석,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사실관계의 범위를 함부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가능한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

이를 따르다보면 때로 우리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판결이 내려지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칙에 대한 예외를 하나 둘씩 인정하다보면 어느 샌가 무엇이 원칙이었고 무엇이 예외였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때가 오게 될 수도 있다. 잠시 원칙에서 벗어나게 됨으로써 사람들의 정의감을 만족시킬 판결이 내려지게 될 수도 있겠지만, 어느 날 국가가 갑작스레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그 국가가 그렇게 깨어진 원칙을 다시금 악용하려 들 수도 있다.

설마 자유롭고 정의로운 우리의 국가가 그럴 리야 있겠느냐고?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배타성과 몰관용성, 음험한 국가주의의 역풍이 유럽과 전 세계에 다시 휘몰아 닥칠 거라고 누가 쉽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에 원칙은 함부로 깨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안희정 사건’에 대한 제1심 법원의 판결로 많은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듯하다. 이 판결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법원의 판결이 만능은 결코 아니다. 법원은 입법기관이 아니며, 주어진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기관이다. 법률 규정은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함이 없는데 법원의 해석으로만 적용범위와 대상을 넓혀나가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위험하다.

규율의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법률 자체를 지금보다도 훨씬 더 세세하게 고쳐나가려는 입법 차원의 노력이 절실하다. 이번의 #미투가 성폭력과 관련한 우리 형사법 체계 전반의 근본적 쇄신을 위한 계기가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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