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가해자 중심적 판결” 질타 이어져

물리력 등 ‘위력 행사’ 증거 없으니

성폭력 아니라는 재판부

권력형 성폭력 본질 이해 못했나

 

‘안희정 무죄판결에 분노한 항의행동’이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 무죄판결을 규탄하는 ‘안희정 무죄 선고한 사법부 유죄’집회를 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안희정 무죄판결에 분노한 항의행동’이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 무죄판결을 규탄하는 ‘안희정 무죄 선고한 사법부 유죄’집회를 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최악의 가해자 중심주의적 판결이 나왔다”는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가해자와 달리 피해자 진술이 일관됨에도 재판부는 ‘위력 행사 증거와 정황이 없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자에게 가해 입증 책임을 떠넘기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외면한 셈이다.

‘미투(#MeToo)’ 운동으로 한국 사회에 만연한 권력형 성폭력 실태가 낱낱이 드러난 뒤 나온 판결이라 충격은 더 컸다. 많은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쥔 상황에서 은근한 거부 의사도 표현하기 힘들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1심 재판부는 ‘업무상 위력’ 범위를 터무니없게 좁게 판단해, 물리력 등 ‘위력 행사’ 증거가 없으니 성폭력이 아니라고 판단해 피해생존자들에게 상처만 줬다. 성폭력에 대한 세계적 인식 변화 흐름은 물론, 성폭력 관련 판례의 변화 흐름조차 따라잡지 못한 부끄러운 판결로 남으리라는 평가가 나온다.

무죄 판결에 법조계서도 비판 일어

로스쿨도 “피해자 품행 심판” 성명

무죄 판결에 법조계는 술렁였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는 로스쿨생들이 이례적으로 1심 재판부를 공개 비판했다. 전국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젠더법학회연합(전젠연)은 지난 19일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1심 판결에 부쳐’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1심 재판부가) 피해자 전 인격에 대한 광범위한 ‘품행 심판’을 진행했다”며 규탄했다.

“재판부, 성적 자기결정권 잘못 이해

소매치기 피해자에 ‘돌려받을 권리’

왜 행사 안했는지 묻지 않는데

성폭력 피해자에 성적 자결권

행사여부 묻다니 부당하다”

1심 재판부가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줬다는 지적도 나왔다. 선고문에는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이 결코 낮다고 볼 수 없는 피해자로서는 적어도 피고인의 행위가 미투 운동의 사회적 가치에 반한다고 언급하거나 오피스텔 문을 열고 나가는 등으로 최소한의 회피와 저항을 할 수 있었을 것” “운전비서와의 갈등 상황에서 드러나다시피 피해자는 개인적 취약성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없었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등이 무죄 판결의 이유로 언급됐다.

이에 대해 차혜령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성적 침해’ 자체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범죄다. 따라서 성폭력 피해자가 적극적인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 여부를 검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봤다.

그는 “도둑이 소매치기를 하는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도둑에게 왜 ‘소유권에 기초한 소유물 반환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았는가를 묻는 일은 없다”며 “마찬가지로 사람을 협박해 추행하면 강제추행죄가 성립하는 것으로 끝나지, 추행으로 인해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됐는지, 피해자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있었는지 다시 묻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1심 재판은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 가능성을 피고인에 대한 관계에서가 아니라 제3자로 넓혀 판단했다는 점에서 더욱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피해자가 아닌 다른 도청 직원에게까지 ‘위력’을 일반적으로 행사했는지, 남용했는지 심리하고 ‘위력의 존재감’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번 사건의 쟁점과는 무관하다는 비판도 있다. 차 변호사는 “재판부는 피고인이 ‘권위적이거나 관료적이지 않고 참모진과 소통하는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위력이 일상적으로 행사되거나 남용’되지 않은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다른 직원’에게 ‘위력의 일상적 행사나 남용’이 있었는지 여부는 ‘피해자’에게 ‘위력으로써 간음’한 공소사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검찰, 21일 항소장 제출

“법리 오해·사실 오인·심리 미진”

서울서부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부장 오정희)는 21일 서울고등법원에 안 전 지사 사건에 대한 항소장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1심의 ‘법리 오해, 사실 오인, 심리 미진’이 주요 항소 이유다.

“판례 있는데도 위력행사 범위 좁게 해석”

검찰은 ‘안 전 지사와 피해자 간 위력은 존재했으나 이를 행사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증명이 부족하다’는 1심 판단에 ‘법리 오해’가 있다고 봤다. 이 사건보다 더 성폭력 혐의를 입증하기 어려운 사안들도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한 선례가 있다. 또 도지사 직위를 이용해 성폭행했음에도 무죄로 본 것은 법에 명시된 ‘위력 행사’ 범위를 너무 좁게 해석했다는 주장이다.

“피해자 측 증거 배척...가해자 측 진술 번복 따지지 않고 주장 그대로 인용”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낮다’는 1심 판단엔 ‘사실오인’이 있다고 봤다. 재판부가 피해자 측 진술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가해자 측 진술은 별다른 검증 없이 신뢰했다는 주장이다. 검찰은 “통화 내역이나 피해자의 피해 호소를 들은 증인 등 증거자료가 충분한데도 재판부가 증인 등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취지로 배척했다”고 밝혔다.

앞서 안 전 지사는 피해자의 폭로 직후인 지난 3월 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입장문을 올려 가해를 사실상 인정했다. “저로 인해 고통을 받았을 김 씨에게 정말 죄송하다.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다. 모두 다 제 잘못이다.” 그러나 검찰 조사에 응하면서부터는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고 생각했다”고 말을 바꿨다. 재판부는 이 점을 따져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판결문을 보면, 1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낮다”고만 할 뿐 안 전 지사 진술의 신빙성은 따지지 않았다.

“피해자 심리상태 분석도 미진”

검찰은 전문심리위원들이 피해자의 심리상태 등을 분석해 재판부의 판단을 돕는 과정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봤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이 다른 증인들과 상충되고 일관되지 않아 신뢰하기 어려우며, 성폭력 피해로 인한 심리적 문제로도 보기 어렵다’고 봤다. 그러나 검찰은 “전문심리위원 중 검찰이 뒤늦게 전문성과 공정성 갖춘 사람들을 위원으로 선정했는데도 심리가 제대로 안 된 부분이 있다”며 심리가 미진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안 전 지사 측이 요청한 전문심리위원들의 분석만 받아들였고 검찰 측이 요청한 전문심리위원들의 분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제 공은 고등법원으로 넘어갔다. 피해자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며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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