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삶을 바꾼 30대 사건]  

93년 서울대 화학과 실험실서

교수에 의한 지속적 성희롱

조교가 거부하자 재임용 탈락

대자보 통해 문제 공론화 하자

신교수가 먼저 명예훼손 소송

“왜 이제야 문제 삼느냐”

“참을만한 성희롱 아니냐”

피해자 향한 따가운 시선도

7년 법적 투쟁 끝 ‘승리’

비뚤어진 성문화 드러내고

성희롱도 처벌 가능해져

 

1993년 11월5일 248호 ‘성추행 문제 최초의 여론화 작업에 관심’ 제하의 기사. 여성신문은 사건의 궤적을 따라가며 이 사건이 상하 권력관계에 의한 고의적 범죄이자 노동권을 침해하는 사건임을 적극 알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1993년 11월5일 248호 ‘성추행 문제 최초의 여론화 작업에 관심’ 제하의 기사. 여성신문은 사건의 궤적을 따라가며 이 사건이 상하 권력관계에 의한 고의적 범죄이자 노동권을 침해하는 사건임을 적극 알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8월 24일 서울대 중앙도서관 게시판에 대자보가 나붙었다. 화학과 신OO 교수로부터 지속적으로 업무 상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대자보는 화학과에 기기담당 계약직 조교였던 우모씨가 작성한 것이었다. 수십 차례 성희롱에 이어 ‘단둘이 입방식(실험실)을 하자’는 제안까지 이어졌다. 우씨가 거부의사를 밝히자 그때부터 신 교수가 업무상 불이익을 줬고, 결국 자신을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는 폭로였다. 2018년 #미투(Metoo) 운동 중 하나가 아니다. 이 사건은 1993년 성희롱 문제를 한국 사회에 드러낸 ‘서울대 신교수 사건’의 서막이다. 성희롱 가해자에 대항해 6년 간 법정 투쟁을 벌인 피해자 우씨는 결국 승소하고 성희롱 피해를 인정받았다. 우씨의 승리는 남녀고용평등법에 ‘성희롱’이 명시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도 우 조교가 겪은 직장 내 성폭력과 이어지는 2차 피해는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여성신문은 사건의 궤적을 따라가며 이 사건이 상하 권력관계에 의한 고의적 범죄이자 노동권을 침해하는 사건임을 적극 알렸다. 아울러 “성희롱이 물리적 힘이나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계에 의한 점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번 일을 계기로 성희롱에 대한 기준과 제재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1993년 11월5일 248호 ‘성추행 문제 최초의 여론화 작업에 관심’). 당시 대다수 매체가 사건을 ‘서울대 우조교 사건’으로 명명하며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내세워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줬다. 여성신문도 ‘서울대 여조교 사건’으로 쓰면서 부족한 인권감수성을 드러냈다. 이후 문제를 인식하고 ‘서울대 신교수 사건’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총학·여성단체·인권변호사 연대

이 사건은 1992년 5월 29일 우씨가 서울대 화학과에 기기담당 조교로 출근하면서 시작됐다. 대법원 선고문(1998년 2월10일)에는 신 교수의 성희롱과 고의적인 신체접촉 사실이 드러난다. 신 교수는 기기교육을 빙자해 키보드를 치고 있는 피해자의 등에 가슴을 대거나 피해자의 팔 위를 잡는 등 수십 차례 업무상 불필요한 고의적인 신체접촉을 했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피해자의 등에 손을 대거나 어깨를 잡았고, “요즘 누가 시골 처녀처럼 이렇게 머리를 땋고 다니느냐”면서 피해자의 머리를 만졌다. 신 교수는 피해자에게 “단둘이서 입방식(실험실)을 하자”거나, “둘이서 산책을 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우 조교는 신체접촉을 모면하기 위해 실험실 안에서 스웨터 위에 두꺼운 외투를 입으며 거부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자 93년 6월 임기만료 5일을 앞두고 우 조교는 재임용에서 탈락됐다. 우 조교는 부당한 조처의 해결을 바라는 진정서를 학교에 보냈으나 학교는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93년 8월 그는 대자보로 억울함을 호소했고, 총학생회와 대학원 자치협의회, 여성문제 동아리협회가 ‘진상조사위원회’를 결성했다. 진상조사 결과 우 조교의 피해가 사실로 확인됐다. 그런데 가해자로 지목된 신 교수는 93년 9월 16일 오히려 우 조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이때 12개의 여성·시민단체, 서울대대학원자치회협의회, 서울대총학생회가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동대표 최영애·이상덕)를 꾸리고 신 교수와 대리감독자인 서울대학교, 국립대 설치 운영자인 대한민국을 고소한 소송을 지원한다. 이종걸(현 국회의원)·박원순(현 서울시장)·최은순 변호사(현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가 공동대리인단으로 나서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성희롱 소송 사건이 시작됐다.

 

1993년 10월 19일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대책위원회 기자회견 모습. ⓒ한국여성단체연합
1993년 10월 19일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대책위원회 기자회견 모습. ⓒ한국여성단체연합

인권침해이자 범죄

94년 4월 18일 1심 재판부는 신 교수가 우 조교에게 3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성희롱 피해는 인정하면서도 학교와 국가 책임은 묻지 않았다.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 처음 등장하면서 그동안 ‘친밀감의 표시’로 여겨지던 불필요한 언행이 ‘성희롱’이며, 이는 인권침해이자 범죄라는 점을 분명히 한 첫 판례였다.

2심에선 성희롱이 인정되지 않았지만 98년 2월 10일 최종영 대법관이 신 교수의 성희롱을 인정하고 같은 해 6월 25일 서울고법 홍일표 판사가 신 교수에게 500만원 배상 판결을 내리며 6년에 걸친 긴 법정 공방은 막을 내렸다. 신 교수는 98년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한 책 『나는 성희롱 교수인가』 출간하기도 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당시 공동대표 지은희·한명희)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그동안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었던 상사에 의한 여직원 성희롱을 여성 인권에 대한 침해이자 처벌이 뒤따르는 범죄로 규정한 것이라서 이와 유사한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여성이 가해자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인 기준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1998년 2월20일 463호).

재판 과정에서 우 조교는 근거없는 소문과 비아냥으로 2차 피해를 겪어야 했다. ‘왜 피해 당시 문제제기하지 않고 해임 당한 후에야 문제 제기했느냐’는 의심과 ‘친밀감의 표시인데 과하다’는 교수 동정론도 일었다. 가해자 신 교수는 우 교수의 실질적인 고용주였다. 우 조교는 출근하자마자 상황 파악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직속 상관에게 성희롱과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재임용 여부를 쥐고 있는 실질적인 고용주라는 ‘위력’ 앞에서 피해를 입고도 즉각 대항할 수 없었다. 두꺼운 옷을 입거나 표정 등으로 거절의사를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피해자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판례는 성희롱을 노동문제로 인식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성희롱의 정도(수인한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국가와 서울대학교 총장에 관한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점은 한계로 남았다(1998년 3월6일자 465호).

여성신문은 사건을 마무리하며 대법원 승소 판결의 주역이었던 박원순·이종걸·최은순 공동변호인단이 1998년 3월 한국여성대회에서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상한 의미를 되짚어(1998년3월13일 466호) 우 조교의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승리임을 환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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