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희 캘리포니아대 리버사이드 교수

한국인 고인류학 박사 1호

딸 출산 후 더 나은 세상

바라며 ‘페미니즘’ 접해

남성 중심 고인류학 속

여성은 지워진 존재

성별 분업도 공고

『인류의 기원』 영문판

사냥하는 여성 삽화로 교체

“세상을 바꾸려면 더

큰 목소리를 내야합니다”

 

한국인 고인류학 박사 1호 이상희 캘리포니아대 리버사이드 교수는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인류의 진화에서 나오는 인류는 반쪽 짜리 인류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국인 고인류학 박사 1호 이상희 캘리포니아대 리버사이드 교수는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인류의 진화에서 나오는 인류는 반쪽 짜리 인류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 정치인이 “남자, 수컷은 많은 곳에 씨를 심으려 하는 본능이 있다”면서 “이는 진화론에 의해 입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투(Metoo) 운동이 수컷의 본능 때문이라는 말에 여성들은 아연실색했다. 그때 고인류학자인 이상희 캘리포니아대 리버아사이드 교수가 이렇게 되받아쳤다. “‘씨를 많이 뿌리는 일’이 본능이라면 ‘가능한 한 많은 수컷과 섹스하기’도 본능이고, ‘섹스 후에 암컷에게 자진해서 잡아먹히기’도 본능이고, ‘경쟁 순위에서 밀려서 평생 섹스 구경도 못 하기’도 본능이다. 본능은 천의 얼굴, 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여성들을 분노케 한 남성 정치인의 괴변이 전문가의 ‘사이다’ 발언으로 보기 좋게 깨진 것이다.

이상희 교수는 ‘한국인 1호 고인류학 박사’라는 타이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 인류학과에서 석·박사를 마친 그는 일본 소고켄큐다이가쿠인대학교, 펜실베이니아 인디애나대학교를 거쳐 현재 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 인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인류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진화 역사를 연구한다. 최근엔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편집장과 함께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고인류학의 성과와 새로운 발견을 풀어낸 책 『인류의 기원』(사이언스북스)이 10쇄를 찍으며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도 올랐다. 하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그는 고인류학자보다 페미니스트 학자로 더 이름 높다. 미국에 거주하면서도 SNS로 꾸준히 한국 여성 이슈에 목소리를 내는 그에게 누리꾼들은 열광한다. 지난 2월 #미투를 ‘나도 당했다’로 번역하는 언론 행태를 꼬집으며 “‘나도 겪은 이야기를 나눈다’라는 능동적 동참”으로 볼 것을 권하는 SNS 글은 빠르게 확산되며 실제로 언론이 ‘나도 겪었다’ 등으로 바꿔 쓰는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미국도 아닌 서울 정동길에서 우연히 만나 인터뷰 요청을 하자, 바로 ‘OK’한 그에게 기자는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부터 물었다. ‘뼛속까지’ 페미니스트인 것 같지만 그는 “엄마가 되고 엄마를 잃은 일”을 겪으며 페미니즘을 접했다고 했다. 페미니스트 고인류학자가 만난 페미니즘과 그가 새로이 ‘발견’한 인류의 기원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저는 흔한 386세대예요. 학교 다닐 때는 ‘인간을 해방시켜야 여성도 해방된다’는 말을 듣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던 세대요.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공부하고 땀 흘리며 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인간이 아닌 남자로서 세상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남자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에 맞춰 살면서 그게 인간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거죠. 무엇보다 2~3년 사이 동시에 엄마가 되고 엄마를 잃은 일을 겪으면서 나 자신이 여성혐오를 체화했다고 느끼게 됐어요. 저는 정말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절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그것 자체가 여성혐오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3년 전 엄마가 돌아가실 때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안에 그 동안의 제 마음을 다 담은 말이었어요. 죄송하고 미안하고 사랑하는 마음. 딸이 태어나면서는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어요. 커리어를 이룬 사람이 아닌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 이 세상이 너무 끔찍한 거예요. 한국에서 여성들이 불법촬영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된 거죠. 나도 겪지 않은 일을 내 딸 세대는 겪어야 하다니. 내가 뭘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제 삶도 되돌아보게 됐고요.”

 

-‘유리천장’ 같은 성차별을 겪으셨나요.

“미국 사회에서 아시안 여성이라는 소수자로서 ‘대나무 천장’을 겪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보직 제의가 들어오면 힘들더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부학장을 맡기도 했고요. 그리고 저도 돌아보니 경력단절 여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한 번도 일을 쉰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고, 교수로서 나름 탄탄하게 소위 ‘철밥통’을 만들어놓고 나서야 아이를 낳았는데, 같은 학교, 같은 교수로 시작했던 남자 동료들과 비교해보니 제가 5~6년 뒤처져 있는 거예요. ‘육아 독박’을 쓴 것도 아니었고, 재정이나 가정적으로도 서포트가 탄탄한 최적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스멀스멀 경력단절이 된 거죠.”

 

-페미니즘이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나요.

“인류 진화 속에서 여자를 찾을 수 없는, 지워진, 사라진, 뭉개진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고고인류학은 눈에 보이는 것을 공부하는 학문인데, 여자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젠더고고학 수업을 들었어요. 제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과 나란히 앉아 젠더고고학 대가인 웬디 애쉬모어 교수의 수업을 들으면서 느낌은 알겠는데 설명이 안 되는 것들에 대한 언어를 갖기 시작했어요. 학부 수업과 대학원 수업을 들었는데 그러면서 눈이 뜨였죠. 배우고 나서 보니 인류의 진화에서 나오는 인류는 반쪽짜리 인류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도구를 만들고 사냥을 하고 농사를 한 것이 정말 ‘남성’만이었을까라는 의구심이 생긴 거죠.”

 

『인류의 기원』 영문판 표지
『인류의 기원』 영문판 표지

-미국 노튼 출판사가 출판한 『인류의 기원』 영문판 표지에 사냥하는 여성을 묘사한 삽화가 담겼어요. 제목도 인류를 뜻하는 ‘mankind’에서 ‘humankind’로 교체했다고요.

“한국에서 책을 내고 난 뒤에야 삽화가 대부분 남성으로 묘사돼 있고 일부 여성 삽화도 앉아서 아이를 돌보는 모습을 담겨 성별 분업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찝찝했지만 삽화를 바꿔 달라는 요구가 거부감이 들거나 논란이 될 수도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어요. 바꾼다고 해도 선뜻 내놓을 대안도 없었고요. 영문판을 출판하기로 하면서 일단 해보자는 생각에 처음에는 출판사에 삽화가 남성 편향적이니 빼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랬더니 출판사에서 그러면 여자를 그려올 수 있겠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한국 출판사에 이야기하니 흔쾌히 다시 그리자고 하시는 거죠. 그런데 삽화를 만드려고 보니 모델이 될 만한 그림이 없다는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가장 쉬운 길로 가자는 생각에 이미 있는 삽화를 여자로 바꾸자고 제안했죠. 그렇게 탄생한 게 여성으로 묘사된 진화 단계, 사냥하는 여성의 모습이에요. 미국 출판사는 새로 만든 삽화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면서 사냥하는 여성 삽화를 표지에다 넣었고요. 그때 교훈을 얻었어요.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 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을요. 그리고 또 하나. 제가 이제 말 한마디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됐다는 걸 확 느꼈어요. 그러면서 욕먹을 일, 불편한 이야기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죠. 제게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도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듣도록 굳이 글로 남기려고 해요.”

 

『인류의 기원』 10쇄에 실린 삽화. 인류 진화의 모습이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묘사했다. 토끼도둑 ⓒ (주)사이언스북스, 2015
『인류의 기원』 10쇄에 실린 삽화. 인류 진화의 모습이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묘사했다. 토끼도둑 ⓒ (주)사이언스북스, 2015

-앞으로 계획하고 계신 연구는.

“저는 커리어의 후반부에 있어요. 바꿔 말하면 아무거나 해도 된다는 거죠(웃음). 어떤 평가를 받을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커리어 구성을 위해 전략적으로 연구 주제를 선택하지 않아도 돼요. 작년에 대학원생과 함께 구글 이미지 대표성 조사를 했어요. 이미지 검색을 통해 나오는 결과 이미지의 성비와 어떻게 표현돼 있는지 조사하는 거예요. 소규모 샘플 조사였지만 압도적으로 남성 이미지가 많았었어요. 예를 들어 ‘선사인’으로 검색하면, 도구를 만들고 벽화를 그리고 사냥하고 뛰어다니는 사람은 주로 남자예요. 여성은 쭈그리고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거나 고기를 굽는 정적인 문화의 수혜자로 등장해요. 또 여성은 이미지 중심이 아닌 아래쪽에 배치돼 있고요. 연관된 행위도 현대에서 생각하고 있는 성별 분업이 투영된 결과들이죠. 물론 구글 이미지는 학계 정식 의견이 아니에요. 일반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것이지만. 제일 공고하게 짜여져 있는 틀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동안은 인류를 이루고 있는 여러 얼굴 중에 특정 얼굴만 부각됐어요. ‘인류’하면 신체 건장한 남성 어른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여성도 있고 아이도 노인도 있어요. 그들은 주류 옆 변두리에 있는 게 아니라 당당한 인류의 한 부분이라는 거죠.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얼굴들, 다양성에 조명을 비추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기원』 10쇄에 실린 삽화. 여성 선사인이 사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토끼도둑 ⓒ (주)사이언스북스, 2015
『인류의 기원』 10쇄에 실린 삽화. 여성 선사인이 사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토끼도둑 ⓒ (주)사이언스북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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