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성차별 없는 극장, 우린 이렇게 만듭니다
성폭력·성차별 없는 극장, 우린 이렇게 만듭니다
  • 이세아 기자
  • 승인 2018.10.09 18:21
  • 수정 2018-10-19 1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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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극계 성폭력 고발자·연대자들이 만든

 ‘차별 없고 안전한 극장 위한 지침’

시카고 시어터 스탠다드(CTS)

연극 첫 리허설 현장. 연출, 배우들, 스탭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모두가 30분간 ‘차별 없고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지침’을 소리 내 읽고 의견을 나눈다. 열린 자세로 소통하고, 일터 내 성폭력에 침묵하거나 관용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예컨대 극중 성적 행위나 노출이 요구된다면 오디션 시점에서 당사자 배우의 동의를 구한다. 모든 출연자는 공연 준비를 위해 안전하고 존중받으며 최대한 개인적인 공간을 보장받아야 하며, 18세 미만 출연자에게는 개인 탈의실을 이용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배우는 특정 인종이나 문화에 대한 편견을 조장할 우려가 있는 의상이나 분장 등에 대해 언제든지 문제 제기할 권리가 있다.  

일하다 보면 터놓고 말하기 어려운 여러 고충과 불만이 발생할 수 있다. 앙상블 배우들(주연과 조연을 제외하고 여러 단역을 모두 소화하는 배우들)이 신뢰하는 인물이 ‘감독자’가 돼, 고충과 불만을 듣고 지침에 따라 해소해 나간다. 공연예술계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향일까? 미국 연극계에서는 2015년부터 진행 중인 프로젝트, ‘시카고 시어터 스탠다드(Chicago Theater Standard, CTS)’다. 

CTS는 오디션, 프리프로덕션부터 연습, 공연 종료 시점까지 제작 환경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과 대처 예방책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현장 백서다. 시카고의 극단 대표들, 예술가들, 행정가들이 2년간 각자의 경험과 전문성을 보태 제작했다. 극단들은 CTS를 활용해 별도의 비용 없이도 안전하고 평등한 공연 환경을 만들 노하우를 얻을 수 있다. 한 배우가 상대에게 무대에서 성적 접촉을 하면 어떻게 할지, 감독이 배우의 동의 없이 노출이나 성적인 움직임을 요구하면 어떻게 할지 등 실제 연극 현장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 상황과 대처법도 담았다. 최근 들불처럼 번진 ‘미투(#MeToo)’ 운동을 계기로 미국 내에서도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CTS는 성폭력 피해 고발자들과 연대자들이 만든 프로젝트다. (왼쪽부터) 미국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배우 로라 피셔와 로리 마이어스는 CTS 프로젝트를 이끌어온 주축이다. ⓒ(Gray Talent Group, Grossman & Jack Talent)
CTS는 성폭력 피해 고발자들과 연대자들이 만든 프로젝트다. (왼쪽부터) 미국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배우 로라 피셔와 로리 마이어스는 CTS 프로젝트를 이끌어온 주축이다. ⓒ(Gray Talent Group, Grossman & Jack Talent)

CTS는 성폭력 피해 고발자들과 연대자들이 만든 프로젝트다. 미국 시카고에서 활동하던 배우 로리 마이어스는 과거 지역 유명 극장에서 모 남성 배우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했는데, 뒤늦게 자신 외에도 여러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분노했다. 2015년 초, 마이어스와 그의 동료 배우인 로라 피셔는 피해고발자들과 함께 업계 내 성폭력 성차별에 반대하는 ‘Not in Our House(우리 극장에선 안 돼)’ 운동에 나섰고, 이를 지지하는 연극인들의 연대체(Not in our house Chicago Theater Community)가 결성됐다. 이들은 그해 3월 CTS 개발에 착수했다. 피셔, 연극 예술가와 행정가 등이 모여 초안을 만드는 데 1년이 걸렸다. 20개 극장에서 자체 연극 연습에 CTS를 결합해 시범적으로 활용했고, 계속해서 개선 보완해 나갔다. 

평등한 일터를 위한 지침이 없었던 건 아니다. 미연방 고용기회균등위원회(EEOC: 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에서 제공하는 지침이 있으나, 특정 규모 이상의 조직에야 적용 가능하지, 소규모 단체, 프리랜서, 자원봉사자 등에겐 무의미하다는 비판이 일었다. CTS는 조직 규모, 조합 가입 여부 등을 떠나서 다양한 형태의 조직, 예산, 환경에 따라 적절히 변형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들려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율적 가이드라인’이다. 협정서나 계약서가 아니며 법적 구속력이 없다. 오히려 그렇기에 “각 기관의 경험과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응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CTS는 “창작환경이 안전하지 못할 때 예술가와 예술 모두가 위태로워진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예술가들은 학대나 안전하지 못한 행동에 대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관련자들 사이에 권력의 차이가 있을 때 더 두려워한다. 예술가들은 큰 소리를 내어 쇼를 망치거나 자신의 평판을 망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심한 학대 행위를 견디다 업계를 떠나기도 한다. 즉시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안전하지 못한 환경과 괴롭힘에 대처하는 법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CTS 소개 중)

한국의 페미니스트들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품고 한국 현실에 맞는 가이드라인을 만들려 노력하고 있다. 2015년부터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터져나온 성폭력 성차별 고발을 계기로 다양한 시도들이 이어졌다. 남순아 감독은 영화 ‘걷기왕’의 전 스탭을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하는 보기 드문 시도로 화제에 올랐다. 전국영화산업노조는 성평등 성희롱 예방교육이 유급으로 모든 스탭들에게 제공돼야 한다고 촉구해왔고, 표준근로계약 작성 확산에도 힘쓰고 있다.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고 대책 마련을 촉구해 온 여성들의 연대체 ‘여성문화예술연합’은 지난해 11월 한국여성인권진흥원과 함께 ‘문화예술계 성폭력 피해자 지원 가이드라인’를 제작 배포한 바 있다.  여성가족부에서 이를 책자로 만들어 전국 해바라기센터에 배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CTS처럼 공연예술계의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 세세하고 종합적인 가이드라인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CTS의 창안자들 중 한 명인 피셔가 내년 2월 한국을 찾는다. 극단 잼박스/컴퍼니 배드 소속 연출가이자 배우인 박영희 씨는 지난 7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주최 ‘연대의 힘’ 국제 포럼에서 “피셔의 오랜 경험과 지혜를 나누는 국제 포럼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 현실에 맞는 미래의 코리아 스탠다드”가 조만간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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