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성차별 조기 정년제도 폐지 이끈 김영희씨
‘여성 직종’이던 전화교환원
55세 정년을 43세로 축소
일반직·기능직은 그대로
처음 문제제기 하고
7년의 법정 투쟁 끝에
1·2심 뒤집고 대법 ‘승소’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만류도, ‘미쳤다’는 욕설과 조롱도 전화교환원 김영희씨를 넘어뜨리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아랑곳 않고 한국전기통신공사를 상대로 1983년부터 7년에 걸친 법정 투쟁을 벌였고, 마침내 ‘성차별 조기 정년제도 폐지’라는 승리를 일궈냈다. 김영희씨 개인의 승리이자, 여성노동자 모두의 승리였다. 80년대 여성노동자가 주체가 돼 노동시장의 성차별 관행에 반기를 든 이 일은 세상을 바꾼 사건으로 아직도 회자된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일흔을 넘긴 김영희씨는 여전히 노동 현장을 지키는 ‘영원한 현역’이다. 노동부 고용조정위원회 근로자위원, 전문직여성클럽 한국연맹 제1부회장을 역임하고 1995년 민자당 비례대표로 서울시 의원을 거친 그는 현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시니어여성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50세 이상 노동자를 가입대상으로 하는 한국노총 전국시니어노조 산하 조직이다. 시니어 여성노동자들의 울타리가 되기 위해 2015년 설립됐다. 45년간 노동현장을 지킨 그는 자신을 “실천주의”라고 소개하며 “무슨 일이든지 현장에 답이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사건이 있은지 30년이 흘렀지만 이름부터 날짜까지 아직도 생생하게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전화교환원 정년차별 사건’을 기억했다. 그는 “잊을 수 없다”며 기억의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7년여의 법정 투쟁에 대해서는 “해야할 일이어서 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싸움을 한 게 아니에요. 해야할 일이어서 한 거죠. 법이 마련돼 있는데 회사에서 바꾼 방침이 법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 맞나 안맞냐 대본거예요. 해봐야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에게서 남들이 아니라고 할 때 홀로 ‘예스’를 외치던 그의 뚝심이 느껴졌다.

여성 직종이던 ‘교환원’

사건은 1961년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일을 하던 그가 체신부 중앙전화국 교환원으로 임용되면서 시작한다. 김 위원장은 이후 20년간 체신부 소속 기능직 공무원으로서 교환원으로 일했다. 1982년 체신부 전기통신 업무가 한국전기통신공사(이하 한국통신)로 이관되면서 그는 공사의 일반직 5급 교환원으로 옮겨 같은 일을 한다. 본격적인 문제는 이때 부터다. 공사가 그해 5월 인사 규정을 바꾸면서 교환직원 직렬의 정년만을 43세로 줄인 것이다. 다른 일반직 정년은 55세 그대로 였다. 당시 전체 교환원 7480명 중 남성은 3명으로 교환원의 99.9%가 여성으로 이뤄져 있었다. 사실상 여성 교환원의 정년만 12년 줄인 ‘성차별적 정년 퇴직제도’ 였다.

전화교환원은 70~80년대 여성들에게 인기 직종이었다. 당시에는 전화국에 수천 명의 교환원이 각 가정이나 직장으로 전화선을 연결해줘야 통화가 가능했다. 시민들이 여성 교환원을 선호하면서 교환원은 대다수가 여성인 ‘여성 직종’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교환원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공연히 성차별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정확히 교환원 업무도 모르는채 덜컥 기능직 공무원 임용 시험에 붙었다. 피나는 노력과 동료들의 도움으로 업무에 익숙해지던 무렵 그는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노동조합도 어던 일을 하는지 제대로 모르는 채 가입했어요. ‘노조 가입하면 노동자에게 좋다’는 동료의 권유에 마지못해 가입원서를 썼어요. 그날이 61년 7월 1일이었어요. 그때는 제가 곧바로 노조 간부를 하고 지금까지 노동운동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죠.”

그는 회사 안에서 하는 교육을 비롯해 국제우편전신전화노련(Postal, Telegraph and Telecommunication Workers International, PTTI)에서 하는 합숙 교육을 받는 등 노조를 공부하면서 “노조와 회사는 결국 상부상조하는 조직”이라고 여기게 됐다.

 

 

여성신문은 1989년 5월 5일자 22호에서 전화교환원 김영희씨가 1982년 정년무효확인소송을 시작, 7년 만인 1989년 4월 20일 승소판결을 받아냈다고 보도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성신문은 1989년 5월 5일자 22호에서 전화교환원 김영희씨가 1982년 정년무효확인소송을 시작, 7년 만인 1989년 4월 20일 승소판결을 받아냈다고 보도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7년여에 걸친 재판 ‘승소’

82년 인사 규정이 바뀐 뒤 첫 번째 정년퇴임자는 김 위원장이었다. 당시 노동조합 간부였던 그는 공사와 노조 측에 강력 반발했다.

“똑같이 일하고 직위도 같은데 교환원만 정년을 줄인 이유가 무엇이냐”, “노조는 왜 교환원 정년 축소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나”.

하지만 회사도 노조도 그의 말을 외면했다. 등 떠밀려서 정년퇴임한 김영희씨는 법정 투쟁을 결정한다. 정년퇴임 뒤 보름이 지난 1983년 1월, 그는 서울지법에 정년퇴직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헌법 제10조와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해 남녀의 성을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근로기준법 제6조에서 규정하는 성차별 금지 규정에 위배된다는 이유를 들었다.

1·2심은 김 위원장의 패소했다. 남성인 노조위원장이 공사 측 증인으로 법정에 나와 “노조가 인사 규정을 인정했으므로 유효하다”며 김씨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계가 연대해 김씨를 열렬히 지원했다. 한국노총과 한국여성단체협의회를 중심으로 ‘여성차별 정년무효확인소송 후원회’가 결성되고 국회 보사위에서 여성 기능직 공무원 정년 연장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여론이 움직이자, 결국 대법원도 김씨의 손을 들어준다. 1988년 12월 27일 대법원은 교환원의 조기정년은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부당한 처분으로 근로기준법에 위반된다고 판단했다. 83년 시작된 법정 투쟁은 7년이 지난 1989년에서야 일단락된다.

김 위원장의 7년 간의 법정 투쟁은 여성에 대한 정년차별과 결혼퇴직제 등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겪는 성차별을 공론화하는데 의미있는 역할을 했다. 여성계의 연대 투쟁으로 사회 각 분야 여성 조기정년 관행에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실제로 이후 비슷한 소송이 이어졌고 승소 판결도 잇달아 나왔다. 결국 이러한 움직임은 1989년 12월 4일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됐다.

대형회사를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이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그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같은 직급인데도 동일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일 아니냐”며 “(문제제기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2권 분량의 정년차별 관련 판결문을 입수하는 등 열심히 소송에 임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조롱 섞인 비아냥이 쏟아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계가 연대해 그를 지원했고 결국 변화를 만들어갔다. 김씨는 “누가 해주기만을 바래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며 “‘좋은게 좋다’고 넘기지 말고 문제가 보이면 문제를 제기하고 목소리를 내야 사회도 변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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