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주/위가건축 대표,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24년전 건축공학과에 입학하고 들은 첫 이야기가 “졸업하면 시집갈 것을 괜히 건축과에 들어와 남의 집 귀한 아들 자리를 빼앗았냐”는 것이었다. 남의 집 귀한 아들의 자리를 뺏은 자리 값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그 값을 톡톡히 지불하며 살아가고 있다.

학교에서는 별로 큰 어려움을 몰랐지만 막상 사회에 진출하면서(남자들의 영역에서 일하면서) 어려움이 시작된다. 아이 키우기와 가사를 건축과 같이 진행시키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였고 그 다음으로 힘든 과제가 남자들만이 써왔던 관습을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대체시키느냐였다.

건축허가를 내는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의 까다롭거나 또는 너그러운 해석은 건축물의 규모와 시공의 용이함에 큰 차이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럴 때 어떻게 그 담당자와 좋은 유대관계를 맺느냐에서 남자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런데 우리 사무실 여자 신참 직원이 자기는 구두표도 못 들고 가겠고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도 불편하니 꽃을 들고 가겠다고 나선 적이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모두 난처해 했지만 담당 공무원은 공무원 생활 25년만에 꽃 들고 온 사람은 처음 봤다며 모든 과정을 잘 도와줬다.

지금까지의 현상 설계공모는 가끔 공정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특정 설계사무소에서 미리 현상 내용을 파악하고 설계와 심사위원까지도 준비해놓은 경우가 많은 편이다. 그런 내막을 모르고 참여하는 경우 대부분의 설계사무소들로서는 들러리를 서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한 번은 우리 사무실의 계획안이 대상 지역의 특수 상황을 잘 파악해서 거의 정답에 가까운 안을 만든 적이 있었다. 이런 경우 미리 준비해온 사무실에 의해서 피해를 보지 않아야 할텐데 난감하기만 했다.

심사위원 명단이 공개돼서 심사 전에 모두 찾아다니면서 설명을 하는 동안에 심사위원들의 특성을 파악해서 각 심사위원에게 어울리는 음식을 해 가지고 갔다. 부부금실이 좋은 분에게는 스파게티소스와 와인을, 연구실 학생들이 많은 경우에는 연구실 전체가 같이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를, 연세가 많으신 분에게는 가족들이 같이 드실 삼삼한 간장게장 등등. 일주일간 요리하느라 매일 밤을 새웠다. 그리고 우리 안이 채택이 되었는데 그 이전에 어느 설계사무소의 당선이 내정됐었다는 이야기가 그 후에도 여러 번 들리곤 했다.

시공사와 설계사무소는 공사과정에서 꼭 원수와 같은 관계로 가기가 쉽다. 현장감독들은 어떻게 하면 더 저렴하게 시공할 것인지만 생각하고 있는 이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설계도면보다 더 쉬운 방법으로 멋대로 시공해놓은 결과물을 고쳐야 하는 경우가 꼭 발생한다. 이럴 때 잘 모르는 감독은 여자건축가를 쉽게 보고 안 고치겠다고 버티기 마련이다. 말싸움이 나면 감독은 싸움에 능숙해서 말투와 자세가 전문가의 수준에 이르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처음에는 도저히 싸울 자신이 없었지만 10여년 싸우다보니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아무리 싸움에 능숙한 사람도 존대말로 끈질기게 따지는 사람은 이길 방도가 없는 것이다. 언성을 높여보기도 하고 더 안되면 현장 한가운데 넋을 놓고 철퍼덕 앉아서 움직이질 않으면서도 계속 존대말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방법으로 재시공의 중요성을 알리면 대부분의 시공자들이 근면하게 사는 사람들인만큼 또 순박해서 협조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집에서 담근 술을 한병 들고 가서 지난번에는 죄송했다고 인사하면 그 후로 더 긴밀하게 협력관계가 발전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끔은 협력자들과 먼 현장을 서너 시간씩 같이 차를 타고 다녀와야 하는 경우가 있다. 같이 차를 타고 가면 다른 남자들끼리는 편하고 재미있게 얘기를 나누면서 가는데 여자가 끼면 처음에는 어색하게 앉아있게 된다. 이럴 때 “아이가 몇살이세요?”하면서 대화를 꺼내봤다. 일과는 상관없는 화제이지만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방법이 된다. 나의 전문성은 일의 전체 과정에서 보여주면 되기 때문에 아이 얘기를 한다 해도 협력자로서 존중받는 것에 문제는 없는 듯하다.

위에 언급한 방법들은 일하는 전문 영역에서 초기에 살아남기 위한 방법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이후 시간에는 또 다른 관행이 존재할 것이고 또 다른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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