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은 최근 <말>지에 난 최보은씨의 “나는 박근혜 찍겠다” 발언과 <한겨레> 김선주 논설위원의 “여성도 더러워져야(?)” 그리고 <씨네21> 김규항씨의 “그 페미니즘”으로 이어진 ‘박근혜와 페미니즘’ 논란에 대한 조순경 이화여대 여성학 교수의 반론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최보은·김선주 그리고 ‘노력하지 않는 마초’ 김규항

<한겨레>는 더 이상 ‘여성주의’를 모욕하지 말라

2002년 4월 넷째 주. <한겨레21>을 통해 ‘진보주의자’로 알려진, 자칭 ‘노력하는 마초’ 김규항씨는 박근혜씨를 지지하는 것이 ‘진보’라는 ‘페미니스트’의 주장을 언급하면서 우리 사회의 ‘주류 페미니즘’이 “저급한 사회의식에 머물러 있고 사회적 억압에 무관심하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여성주의의 현장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이 글을 <씨네21>은 실어주었다.

2002년 4월 넷째 주.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선주씨는 “박근혜 의원이 여성대통령 후보가 못될 것이 없다”면서 여성들이 “지나친 결벽주의를 버리고 서로 연대하고 지저분해 질 각오를”할 것을, 그렇지 않다면 “여성은 언제까지나 남성 정치권력에 이용당하는 주변 정치세력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 <한겨레신문>은 논설위원이 쓴 이 글을 신문에 게재했다.

@3-1.jpg

▶조순경/ 이화여대 교수. 여성학

2002년 4월 넷째 주. 인터넷 한겨레는 박근혜씨 논쟁의 일환으로 김규항씨의 칼럼과 김선주씨의 칼럼을 나란히 실었다. 그런데 냉소와 분노, 비아냥만 보일 뿐 논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논쟁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진지함과 성실성을 이 두 글에서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온 이러한 일련의 글들은 더 이상 여성 정치지도자로서의 박근혜에 대한, 여성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 ‘진보언론’이 여성을, 여성주의를 다루는 방식의 문제이다.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한겨레가 더 이상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이와 같은 글들을 계속 내보내고 있음은 한겨레가 ‘여성주의’에 대해 무지하다는, 그러한 무지함을 “자랑스러워할 만큼” 무지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3-2.jpg

우리 사회의 ‘주류 페미니즘’을 ‘저급한 사회의식에 기초한, 그저 남근주의의 이면’이라고 비판한 김규항씨는 무지했기 때문에 ‘용감’했다. 그는 ‘페미니즘’에 대해 무지했고 ‘주류’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 페미니즘의 지형을 읽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여성주의가 무엇인지 주변의 여성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를 아는 데에는 대단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지식인으로서 최소한도의 성실성만 있다면 현재 논의되고 있는 여성주의가 무엇인지, 여성주의에서 추구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는 ‘최소한도의 성실성’도 읽을 수 없다. 그러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가 ‘용기’있게 그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여성에 대해, 여성주의에 대해 함부로 다루어도 반갑게 실어줄 ‘진보’를 표방하는 매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들에서 나는 우리사회에서 여성의 몸이 함부로 다루어지듯이 여성들의 경험과 정신이 마구 다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최보은씨와 김선주씨의 글이 여성주의와 여성들간의 연대에 대한 왜곡이며 김규항씨의 글이 여성에 대한, 여성주의에 대한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는 최보은씨나 김선주씨가 박근혜씨를 지지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라고 할 수 없는 그들의 주장을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음을 문제 삼는 것이다.

박근혜 지지 자체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여성주의 아닌 것을 여성주의라 일컫지 말라

여성주의는 성찰성을 요구한다.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가부장제 문화로 인해 어느 누구도 완전한 여성주의 시각을 가질 수 없으며 어떠한 ‘철저한 여성주의자’라 하더라도 그의 의식과 행동에서 가부장적 잔재를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다. 자칭 ‘페미니스트’라는 사람이 한 말과 행동이 자동적으로 ‘페미니즘’이 될 수 없으며 우리 내부의 가부장적 잔재들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떨쳐버리고자 하는 성찰의 과정이 없는 곳에서 여성주의는 자랄 수 없다.

현실적으로 한 여성 개인이 할 수 있는 경험은 제한되어 있는 반면 여성들의 억압의 경험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하다. 많은 경우 여성들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신과는 다른 여성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간접적으로 여성들의 고통스런 경험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찰성이다. 여성으로 태어났다 해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차별을 ‘절절히 경험’하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엘리트 여성들이 “나는 성차별을 경험한 적이 없다” “여성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를 여성으로 보지 말아달라”고 하는 말들을 최보은씨는 들어보지 못했는가.

이러한 이유로 나는 “모든 여성이 태생적 소수자”이며 박근혜씨도 그러할 것이라는 최보은씨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소수자로서의 의식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그리고 자신을 거부하는 환경과의 지난한 싸움의 과정에서 힘겹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박근혜씨에게서 어떠한 성찰성도 발견할 수 없다. 나는 박근혜씨가 단순히 독재자의 딸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독재자일 수도 있고 성폭력범일 수도 있다. 딸에게 아버지의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성찰은 가능하다. 그 아버지에 대한 일고의 반성도 없이 오히려 그 아버지를 추모하고 그의 길을 따르겠다고 하는 딸에게서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는 다른 어떠한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단순히 박근혜씨가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나왔다는 사실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가 독재자 아버지의 ‘후광’을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제삼는 것이다.

박정희에게 ‘민주주의’라는 언어는 권력을 얻기 위해 필요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으며 여성의 권리는 가부장적 가족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뒷전에 밀려나야 하는 것이었다. 여성의 몸을 ‘달러버는 기계’로 만드는 ‘기생관광’도, 기본적인 권리를 찾고자 했던 여성들에 대한 잔혹한 성고문도, 하루 20시간의 노동을 견딜 수 없다고 저항하는 10대 여성들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도 국가 경제를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보는 그러한 박정희의 정치관에 대해 일말의 성찰도 없는 박근혜씨에게서 우리는 ‘여성’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성찰성은 내가 원한다고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은 오랜 동안의 학습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직면할 수 있는 고통스런 용기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자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오히려 그를 정치적 지도자로 기리는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해서 갑자기 여성들의 고통스런 경험을 이해하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리라고 믿기 어렵다. 이것이 박근혜씨에 대한 지지를 여성의 독자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일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이며 이 땅의 여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이며 여성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이유다.

여성주의의 핵심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이 여성 스스로에게 있음을 믿는 것이다. 그 여성은 일차적으로 ‘다른 여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남성 천국’인 언론을 여성언론인 스스로 바꾸지 못하면서, 수십 년 언론에 몸담고 있는 자신들이 언론계의 가부장성에 조그마한 균열을 내는 것도 그리 어렵다 하면서 어떻게 박근혜씨는 그보다 더한 정치판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성언론인 자신들은 “인사권이 있는 자리에 앉아도 여성문제에 집착한다는 인상을 줄까봐 여성중용을 꺼렸다”고 하면서 어떻게 박근혜씨에게는 “대통령이 된다면 재무, 법무 등의 핵심분야에 여성각료를 등용할 생각이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 자신들이 바꾸지 못한 현실을 어떻게 보수남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박근혜씨는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이보다 더 비현실적인 생각이 어디 있는가?

비판과 고통없는 여성주의 연대는 불가능

'성찰'이 빠진 페미니즘은 있을 수 없어

여성주의에서 의미하는 연대는 모든 여성들이 서로에 대해 아무런 비판없이 하나의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연대는 아무런 고통없이 편하게 “나는 최보은씨의 말에 동의한다·그를 지지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들간의 연대와 지지는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견고한 가부장제의 벽에 조그마한 틈이라도 내보려고 하는 시도에서 그리고 그러한 시도의 결과 겪어야 하는 지난한 고통스러움을 나누는 것이고 그 고통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내가 가진 자원을 나누는 일이다.

이미 충분히 ‘지저분한’ ‘더러운 연대’가 만연한 이 사회에서 원칙을 지키려고 하는 행동을 ‘결벽주의’로 매도하는 이 사회에서 한겨레 논설위원 김선주씨가 우리를 향해 “지저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새삼스레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우리 사회의 철벽과 같은 가부장제 속에서 적당주의

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
abortion pill abortion pill abortion pill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