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렇게도 빨리 선생님이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떠나시던 날, 여성부 자문위원회의에서 낭낭한 목소리로 발언을 하시고 급히 다음 모임에로 떠나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환한 미소에 미안해 하시는 그 표정으로 총총히 떠나시던 모습으로 이 세상도 떠나신 겁니까? 왜 그렇게 급히 떠나셨습니까? 아직도 오래 오래 사실 줄 알았던 우리에게 선생님의 떠나심이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선생님이 가지고 계시던 사회적 약자를 향한 순수한 인간애적 낭만적 운동철학의 종언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70년대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이 불길처럼 솟아올랐을 때 교계의 유일한 여성단체였던 교회여성연합회를 이끌며 여성노동자의 억압현장으로, 동아 조선 해직기자들의 투쟁현장으로, 양심범 가족들을 위한 배려로 투신하셨습니다. 그밖에도 철거민들의 농성현장, 기생관광에 편입되는 가난한 여성들의 현장, 일본에서 귀국해 가난과 병고에 방치된 피폭자들의 현장, 재일교포 박종석군에 대한 히다치회사 민족차별의 현장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억압상황의 자리에는 꼭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각 부문별 운동이 전문화돼가자 선생님은 한국여성운동의 결집체를 위해 당시의 모든 여성단체들을 모아 여성단체연합을 창립하는데 공헌하시고 초대 회장을 맡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강력한 여성운동의 초석을 놓아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의 후진성으로 하여 모든 인권운동들이 반정부운동으로 낙인찍혀서 사람들이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리들은 몽땅 선생님 차지여서 우리를 무척 속상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선생님은 밝은 미소로 그 어렵고 손해나는 자리를 지키셨고 언제나 관심은 소외되는 여성들의 현장에 가있었습니다. 사실 정계에 진출하실 때도 선생님은 여성운동을 정치화하려는 의도임을 우리에게 이야기하셨지요.

90년대초 선생님은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들과 억압상황이 민족의 분단에 있다는 인식을 가지시고 남북의 화해를 위한 한 걸음을 시작하셨습니다. 1991년 11월 분단선을 넘어 최초로 북한 여성대표단을 영입해 서울에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를 성사시키신 것입니다. 노태우 군사정권하였으나 선생님은 사방으로 정치력을 구사하셔서 놀라운 민간여성교류를 성사시켰고 이어서 1992년 9월에는 남한여성대표단 단장으로 분단선을 넘어 육로로 평양에 가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평양토론회를 성사시키셨습니다.

선생님, 평생을 홀로 사시면서 뜨거운 정열로 여성인권운동과 여성평화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어 주시던 선생님,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편애하셨던 선생님, 전략적 사고에 오염된 우리에게 끝까지 순수하고 낭만적인 인간애 위주의 주장을 정색하시며 펴셨던 그 모습을 추모합니다. 이제는 선생님을 뒤따르던 우리가 선생님이 지향하시던 일을 계승해 나가겠습니다. 안심하시고 편히 쉬십시오.

김윤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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